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은사람 Jul 12. 2020

막다른 골목에서 새 길을 찾다

경력 22년짜리 신규교사가 되다.

선생님 저 오늘 생일이예욧

지난 주말 오후에 울린 카톡 메시지.  K에게서 왔다.

오! 그래 K야 오랜만이다. 생일 축하해 많이 많이. 미역국은 먹었니?

아니요, 아빠 아직 중국에 계세요.

선물하기로 햇반 미역국밥을 보낸다. 

어 미역국밥이네요.

그래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미역국 먹어라.

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코로나 끝나면 교복 입고 학교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러자


2019학년도 2학기가 소환된다. 아프고 아팠던 그 시간들이....


G시에서 18년간 근무했다. 이제 만기가 되어 S시로 전출하는 시점에 6개월짜리 연수를 위해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다. 파견을 마치고 소속교로 복귀하여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6학년 담임을 하라고 한다. 그 학급은 1년간 기간제 교사가 맡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연수 프로그램 내용 중 한 달에 한 번 소속교를 방문하는 시간이 있었고 그 악명 높은 6학년 2반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수업은 거의 불가능했고, 어느 누구도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아이들을 맡게 된 것이다. 

복귀 첫 날인 9월 1일.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교실 붕괴.....


난 제법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경력 2년 만에 받은 영어연수에서 400명 연수생 중 1등을 했고, 교육청 영어연수 강사로 여러 번 강의를 했다. 1급 정교사가 되자마자 학교의 가장 브레인들이 맡는다는 연구부장을 맡아 학교 교육과정 운영계획을 수립하고, 각종 시범학교 운영을 진두지휘했다. 연구 보고서도 써내서 좋은 결과를 얻었고, 교육부 장관 표창에 모범공무원 표창까지 받았다. 게다가 8대 1의 경쟁을 뚫고 미래교육 교원 리더십 아카데미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950여 시간의 엄청난 연수를 이수하고 현장에 적용하려 개선장군마냥 복귀한 인재 중의 인재다. 그런데 첫날 난 주저앉고 말았다. 



교실은 온갖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남학생들은 파워에 의해 서열이 정해진 듯 보였고, 여학생들은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하는 말은 욕이 절반을 넘었고, 누가 더 큰 소리고 다양한 욕을 배설하는지 배틀이 벌어진 것 같았다. 말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말을 했고, 때리고 맞는 것에 대해 서로 무감각했으며, 교실 바닥에 침을 뱉고 다른 사람 물건을 빼앗거나 망가뜨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엉망진창, 무법천지. 교사는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이방인이었다. 왕따를 당하는 여학생 한 명만 자리에 앉아 있고,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실을 돌아다니며 제멋대로 행동했다.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의 구분은 당연히 없고, 규칙과 규율은 부재했으며 교실의 물건들은 성한 것이 별로 없었다. 

국악수업을 위해 채용된 외부강사는 한 시간 수업 후에 바로 사직했고, 과학 전담교사는 우리 반 아이들 때문에 실험기구나 학용품들을 모두 장에 넣고 문을 잠가야 했다. 커터칼, 송곳, 가위, 자전거 체인 등을 휘두르며 서로 위협하며 놀았다. 아수라장이라는 단어가 적합했고, 나의 말은 허공을 떠돌다 스러졌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힘든 상황이 계속되고 주위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던 나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사직서를 내고자 하였으나, 6개월 연수 후 의무 복무기간이 있어 불가능한 상태였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누군가 내 차를 뒤에서 들이받아 주길 바랬고, 밤이면 어두운 거실 소파에 한동안 앉아 아침이 오는 걸 거부하곤 했다. 더구나 2학기 연수는 현장에서 실천하는 현장연구를 하고 보고서를 내야 하는데, 연구는 커녕 생존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잘 먹지도,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신경은 날카로워졌으며 내 삶은 피폐해졌다. 22년 교사 경력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이렇게도 무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있다가는 극심한 우울의 계곡으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아이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기록했다. 빠짐없이 자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아이들을 떠올리며 표정과 어감을 기억하며 읽었다. 얽힌 실타래를 풀 끄트머리를 찾아내야 했다. 내가 찾아낸 끄트머리는 먹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고 오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용돈이 있는 아이들은 학교 앞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먹으며 온다. 당연히 지각이다. 돈이 없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의 먹거리를 빼앗아 먹는다. 다툼이 일어나고 욕과 폭력은 자연스레 뒤따라 온다. 아침부터 화가 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화를 풀어낸다. 체육수업이 있는 날은 그나마 살 것 같다.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배식을 시작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음식을 나눠주는 팀, 더 받으러 조리실로 가는 팀들...  나름대로 규칙과 의리가 있다. 서로서로 챙겨주며 엄청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다. 운동장에서 실컷 놀고 오후 시간에 좀 쉬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청소 따위는 내알 바 아니다. 

우선 아이들에게 아침 먹거리를 주기로 했다. 식빵과 잼을 준비하고 토스터기를 마련해 교실 앞에 두었다. 아침마다 교실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졌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아침은 먹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물으며 빵을 먹으라고 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빵을 치웠고, 빵을 먹고 싶은 아이들은 제시간에 와야 했다. 지각 문제를 해결했다. 빵과 딸기잼의 개수가 제한적이다 보니 친구를 배려하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본 아이들이라 그런지 먹을 것에는 의리가 있었다. 긍정적 행동을 할 때마다 점수를 주고 점수가 모이면 라면 파티를 했다. 어떤 라면으로 파티를 할지 라면을 정하고 그 이유를 쓰면서 국어수업을 했다. 아이들이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업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것을 위센터에 보냈고 바로 개별상담과 그룹상담팀을 지원해 주었다. 역시 상담 전문가는 달랐다. 조금씩 조금씩 아이들이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K의 이야기

K는 아이들보다 두 살이 많다. 갓난아기 때 부모님이 헤어지고 아버지는 K와 누나를 데리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K의 아버지는 남의 손에 아이를 맡겨 기르다가 사업이 여의치 않자 기숙형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겼고 열악한 시설과 부당한 대우에 K는 탈출을 반복하며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K가 열 살 되던 해에 중국의 사업이 망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K는 한국말을 전혀 할 수 없었기에 열 살이지만 1학년에 편입했고 그때부터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한 아버지는 두 남매만 놔두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일을 했고 아이들은 지역아동센터의 도움을 받으며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갔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에 대한 분노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잘 풀리지 않는 삶의 무게를 아이에게 쏟아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학교에 와서 풀어내는 K가 안쓰러웠다. K의 폭력과 분노의 원인을 알고 난 후 더 이상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K가 심한 감기로 하루 종일 사물함 위에 누워만 있던 날, 함께 병원에 가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고 처방전을 받았다. 병원비는 천 원, 약값은 무료였다. 오늘은 센터에 가서 저녁 얻어먹기 싫은데 뭐 먹을 것을 사줄 수 있냐기에 편의점에 데리고 갔다. 몰랐다. 편의점 도시락이 가격순으로 진열되어 있는 줄. 가장 가장자리에 있는 값싼 도시락을 고르는 K가 안쓰러워 먹고 싶은 걸로 고르라고 했더니 컵라면을 덤으로 주는 도시락을 골라 라면은 나에게 건넨다. 자기가 쏘는 거라며....  국가에서 시행하는 예방접종도 나이가 많아 맞을 수 없게 되어 이곳저곳을 알아보다 의료법인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주사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의 예방접종 기록이 하나도 없다.....   그동안 병 걸리지 않고 잡초처럼 살아남은 K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K가 말한다. 쌤이 이 우리 반 쌤 된 건 운명이에요......  


K 외에도 저마다 사연과 상처가 있던 아이들이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히고 위로와 격려를 받아들이고 행동을 바꾸려고 노력한 결과 2020년 1월 9일 모두 무사히 졸업을 했다. 스스의 날에 교복 입고 찾아오기로 했는데 코로나 19 사태로 무산되었다.  나를 이전 과는 다른 교사가 되게 해 준 아이들에게 한 턱 쏘고 싶었는데 아쉽다. 

이론으로 알던것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교육은 관계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운동화 끈을 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