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고양이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나는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들과 나 사이의 의견 대립에는 한 가지 경험을 공유한 데서 비롯된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몰티즈 한 마리를 키운 적이 있었다. 아들에게는 그 경험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먹이를 챙겨주고, 목욕을 시키며, 대·소변을 처리해야 하는 일이 워킹맘에게는 적잖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강아지 털과의 전쟁이 만만치 않게 사람 진을 빼는 일이라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강아지는 아들을 돌봐 주시던 아주머니를 통해 다른 분께 입양이 되었지만, 다시 고양이를 키운다면 그 녀석의 뒤치다꺼리는 내 차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최선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들에게 졸업 선물로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타협의 의지가 전혀 없었던 아들의 고집으로 열흘 후 우리는 새 식구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고양이가 14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는 동안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 고양이 이름이 미역이라고요?
미역은 우리 집 고양이다. 왜냐고? 귀엽고 깜찍한 고양이에게 왜 미역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지어 주었냐고? 고양이의 이름을 듣게 되는 사람들에게서 돌아오는 질문이다. 누구나 그렇게 반문한다. 나 또한 그런 반문이 아주 자연스럽고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미역은 제법 귀족 티가 나는 샴이다. 갈색과 회색 사이의 털을 갖고 있으며, 걸음걸이와 행동하는 자태가 거만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미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불행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나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임이 분명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생후 1개월도 안 된 한 주먹 크기의 고양이가 책상 뒤에서 몸을 드러내고 자신의 집인 양 거실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저녁 식사 중이었다. 그리고 숟가락을 든 채로 고양이에게 일제히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킁킁거리며 이 구석 저 구석을 돌아다니다가 동그란 눈을 들어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런 표정을 보면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을 만큼 작은 몸집의 그 녀석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아들! 양이 이름은 무어라고 지어 줄 거야?”
“글쎄요. 미역이라고 지어 줄까요? 내가 미역국을 좋아하니까 미역이라고 지어 주죠.”
아들은 미역국을 좋아한다. 그것도 몇 번 데워서 흐물흐물해진 진한 국물이 우러난 미역국이 있으면 진수성찬을 마주한 것처럼 좋아한다. 작은 고양이를 바라볼 때 아들의 숟가락 위에는 미역 건더기가 한 덩어리 놓여 있었다. 고양이의 이름은 그렇게 뜬금없이 붙여졌다. 어린 아들의 개념 없는 논리의 산물이다.
예방접종을 맞히기 위해 미역을 데리고 동물 병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양이 이름이 뭐예요? ”
“미역이요”
“미역이? 왜 고양이 이름이 미역이에요?”
“개념 없는 주인을 만난 덕이죠.”
몇 달 후에 미역은 동물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 녀석의 방문 기록을 찾아보니 이름이 ‘미옥’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의사의 의도였는지 간호사의 오기였는지는 모르지만, 고양이의 이름과 미역이라는 이름 사이에 개연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옥을 미역으로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미역이 미옥으로 기록된 과정이 충분히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동물 병원에서는 우리 식구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미역이라는 단어만큼은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미역은 미옥으로 둔갑하였고, 그들은 우리의 단어를 자신들의 의미로 재해석했다. 그들도 나와 같이 미역이라는 이름에 고양이의 불행을 꼬리표처럼 달았을 것이다. 나는 동물 병원 사람들과 아들 사이의 비무장지대에 있다. 나는 우리 집 고양이가 미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 불행이라고 표현했지만, 정작 이름을 붙여주고 이름이 붙여진 아들과 미역은 이름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적이 없다. 고양이는 미역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귀티와 품위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인 줄로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미역이라는 이름으로 14년간 불려 왔지만, 그 녀석의 태도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거만하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이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 집에서 미역이라는 단어는 식탁보다 고양이를 먼저 연상시키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연상 속에는 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거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고양이가 들어있다. 그 녀석은 내게 손도 못 대게 하면서, 아들이 자신보다 게임에 집중해 있을 때면 방문을 긁어 대며 지치지 않고 양양 소리로 앙탈을 부린다. 그리고는 결국 방문을 열어 자신을 품에 안게 한다. 미역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사랑받고 싶은 사람을 선택할 줄 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미역이 자신의 이름을 개념 없는 어린 남자아이가 1초의 고민 끝에 지어 준 이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옛날에는 미역이 와 같은 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개똥이, 쇠똥이, 끝순이, 말년이처럼 사소한 이유로 이름이 붙여진 사람들. 그 이름을 부여받는 자의 인격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이름에 불만이 많았다. 아니,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은 불만 없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당연시 받아들이던 시절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 미역이처럼 말이다.
미역이 와 사람들 사이에는 같은 현상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미역은 자신의 이름이 어떤 이유로 지어졌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여전히 우아하고 거만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하찮게 보이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었다. 이름은 막 지어줘야 잘 산다는 이야기. 이름에 가능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삶의 지혜이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말에 얽매이지 않게 한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식의 폭이 넓어지고 관계 속의 자신을 깨우치게 되면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에게 부여한 가치와 하찮게 불리는 이름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고 자신의 이름을 부끄러워하거나 개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 이외에 호를 붙이거나 예명. 필명을 쓰는 경우는 자신의 또 다른 가치를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의미를 따라 삶을 조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우리 집 고양이 미역은 언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언어의 사회성. 역사성, 기표와 기의에 대해 궁금증을 갖도록 강요하며, 나를 소쉬르에게 데려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