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일봉전망대 안좌도
에 오르면 신안의 섬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전망대 아래에서 차를 세우고 산속에 생긴 임도를 따라서 올라가다가 샛길로 올라가는 길로 가면 전망대가 보인다. 만든 지가 다소 되어서 그런지 의자나 계단이 수리를 요하고 있었다.
채 일봉 전망대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전망대에 오르면 주위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을 듯한데 이미 주위의 나무들이 높이가 전망대의 시야를 가리고도 남았다. 천사대교가 개통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을 때는 관리도 하고 인기의 명소가 되었던 적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장소가 맑은 날 저녁노을이 아름답다고 한다.
바람이 싸늘하고 센 채일봉 전망대를 내려와서 다음 이동할 목적지로 김환기의 생가였다. 생가를 가기 전에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점심을 먹으면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지지만 그래도 맛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맛집은 검색을 통해서 찾는데 카카오맵이나 구글맵을 이용하고 검색어는 '맛집'으로 검색을 한다. 맛집으로 검색을 한 후에 결과에서 다시 정확도순으로 검색으로 하면 거리순으로 검색한다. 내가 있는 위치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 맛집이라고 표시가 된다. 필터에서 평점 3.5점 이상으로 다시 검색한다.
검색 후에 리뷰가 10개 이상이 있는 평점 4.0 이상의 집을 찾고 리뷰를 통해 메뉴를 확인하고 그들의 추천 메뉴를 보고 맛집을 고르게 된다. 구글맵에서는 별점과 리뷰를 보면 간단하다. 구글맵은 해외에서 많이 사용하고 카카오맵은 국내에서 많이 적용된다.
그렇게 해서 고르는 집이었다. 물론 재차 확인을 하는 방법은 그 집 앞에 많은 차가 혹은 식당 안에 손님이 있는가로 판단하면 된다. 손님이 잘 오지 않는 곳들은 반찬들이 순환이 안되어 어제 만든 반찬들이 나오고 재활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집에서 주문한 리뷰의 추천 메뉴가 낙지볶음이었다. 먹고 나오고 보니 '손으로 잡은 뻘낙지입니다'라고 붙여져 있다. 이 집에서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다시 저녁을 먹게 되는데 저녁 메뉴는 더 훌륭했다.
신안은 천사섬으로 섬들이 많다. 신안 안좌면 읍동리 마을은 신안이 배출한 위대한 수화(樹話) 김환기(1913~74)이다.
신안여행은 섬들을 구경하는 것은 사이드이고 메인이 김환기 생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김환기 작가가 여기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해서 서울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전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친다.
현재로서는 김환기의 작품이 한국 미술사에서 제일 높은 그림의 가격을 받고 있다. 2019년 11월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 <우주>가 88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32억 원에 낙찰을 받았다. 이것은 한국 미술 경매 사상 처음으로 100억 원이 넘는 순간이었다.
그의 부친은 도선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백두산에서 가져온 나무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파리와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평생을 고향을 그리워 했다. 그의 작품에는 달, 새, 구름, 바다, 물항아리를 추상적으로 절묘하게 배치한다.
김환기의 아내는 변동림이다. 변동림은 원래 시인 이상(李箱)의 아내였다. 변동림은 이상이 죽고 난 후에 아이가 셋이나 있는 김환기와 재가를 하게 된다. 물론 본처가 있었는데 결혼 후 이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에 변동림은 그 후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변동림이 이상과 결혼한 나이가 21살이었다. 이상과 커피를 마시고 문학을 논하면서 폐병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상과 불꽃같은 사랑으로 결혼을 하겠다고 나선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변동림은 시인 이상(李箱)과 결혼하고 이상은 결혼 후에 요양을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에서 요양생활 도중에 1937년 2월 공원을 산책하다 ‘불령선인(不逞鮮人, 명령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죄목으로 경찰에게 체포된다. 옷차림이 허름하거나 단정치 못하는 조선인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던 시기였다. 체포되어 감금생활 34일 만에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찾아온 변동림은 '이상이 멜론을 먹고 싶다 하여 멜론을 사서 대접했지만 받아넘기지 못하고 미소를 짓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움직였을 뿐 눈이 감긴 채로 있다가 가끔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라고 그의 책 <월하의 마음>에 전하고 있다. 이상이 죽은 1937년 4월 17일에 멜론은 아직 철도 아닌 데다가 가격이 상당히 비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최고의 추상화가로 칭송받는 그는 한국동란 직후 프랑스를 가고 싶어했다. 그 뜻을 안 김향안은 자신이 먼저 프랑스를 가서 터를 잡고 환기를 부른다. 루브르를 가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작가의 흉내를 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국동란전에 자신은 많은 백자 항아리가 뒹굴어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의 집에 사 모아두었는데 피난을 다녀온 후 모두 부서지고 없어져서 안타까워했다. 얼마나 물항아리를 좋아했는지 그림마다 나온다. 그는 농악의 꽹과리를 즐겨 했는데 그의 우주의 그림에도 울림의 퍼짐이 표현되어 있다. 신안의 푸른 앞바다를 우주의 색으로 표현하여 꽹과리의 울림으로 퍼져나가게 했다.
그의 생가 뒤뜰에 있는 감나무가 수화 김환기가 좋아했던 감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을음이 가시지 않은 정지(부엌)에는 단아하게 청소된 말끔한 아궁이 위의 가마솥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나무에 감꽃이 열리는 시절에 다시 이 집을 방문해보면 신안의 푸른 바다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산울림>은 동심원이 퍼져나간다. 꽹과리를 잘 쳤던 수화(樹話) 김환기의 흥이 느껴진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고 일기에 적었던 그는 점화로 미술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징이나 꽹과리를 잘 살펴보면 동심원으로 금속이 둥글게 만들어져 있고 그 속에서 소리가 울림이 있다.
김환기의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작품이었던 이건희 컬랙션 중의 수작이다. 김환기가 파리 시절(1959)에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1950년대 조선방직을 인수해 국내 최대 방직 재벌 기업가가 된 삼호그룹 정재호 회장이 퇴계로에 자택을 신축하며 작가에게 주문한 작품이다. 1960년대 말 삼호그룹이 쇠락하면서 미술시장에 나와 이건희 컬렉션으로 가게 됐다.
신안의 이 섬에서 갇혀 살았다면 김환기가 이처럼 위대한 작가가 될 수가 있었을까? 항상 위대한 사람의 주위에는 그를 돋보이게 키워주는 조력자가 있다. 변동림이 김환기의 능력을 알아보고 평생에 걸쳐서 쌓아온 결실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