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茶山草堂)기행

강진

by 이수철
귤동마을입구

정약용(1762~1836)은 압해(押海)가 본관이다. 조선 시대에 나주목에 속해서 나주 정씨로 불렸다. 조상들은 고려말에 황해도에 살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서울로 이주한다. 8대 조상이 연이어 홍문관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홍문관은 사간원, 사헌부와 함께 학문이 높은 학자 관료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어릴 때 네 살에 천자문을 배웠고 아홉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 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다. 어릴 때 천연두에 걸렸으나 사가 명의 이헌길의 진료 덕분에 살아남아 훗날 마과회통을 집필한다. 결혼 후 처가를 왕래하면서 이가환과 이승훈을 만난다. 이가환과 이승훈은 외삼촌이고 성호 이익의 증손으로 이익 학풍의 중심인물이었다. 22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좋은 성적을 내면서 정조의 총애를 받는다.


1789년 정조 13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진에 진출한다.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는 배다리를 만들고 1791년에 수원화성 설계에 참여한다. 그 후 암행어사를 거쳐 을묘박해때 좌천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된다. 곡산부사 시절 이계심의 난 때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들고나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 천금을 주어야 한다는 격려는 유명하다. 1799년 형조 참의 재직 중 자명소를 올리고 사직한다. 1800년에 정조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순조의 섭정(攝政)으로 천주교 탄압령이 내린다. 진산사건(신해 박해) 이후 천주교를 버렸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정약종이 체포되고 이승훈과 최창현도 투옥되었다.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고 선교 활동을 한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고,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 정약종은 셋째 형이고 진산사건을 일으킨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그가 저술한 책이 500여 권이고 그중에서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수령)의 부임할 때부터 퇴임할 때까지의 마음가짐과 태도이고 「경세유포」는 국가경영에 대한 일체의 법과 제도를 논증한 서적이고, 「흠흠심서」는 실제 수사를 바탕으로 백성들이 억울한 판결을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판결해야 하는 유의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긴다.



다산이 유배 당시 그의 나이 마흔, 부인 홍 씨는 마흔 하나, 두 아들은 열여덟과 열다섯, 막내딸은 여덟 살이었다. 다산의 굴곡진 삶이 이 소나무 뿌리에 들어 있는 듯, 한 오솔길이다. 다산초당에 도착하면 유배지라고 하나 살만했던 모양이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원래는 모두 초가집이었는데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 멋진 기와집(1957년)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이곳은 외가 해남 윤씨의 산속 정자였고 윤씨 집안의 별장이었다.


정약용이 유배하면서 대역죄인이라 안무도 상대해주지 않고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주막집 주모와 딸이 정약용을 맞이하는데 사의재라 이름을 짓고 4년간 머물게 된다. 사의재에 머물면서 황상을 비롯한 6제자들을 지도한다. 추사는 황상의 시를 읽고 제주 유배에서 풀려 한양가는 길에 만나기도 했다.


사의재에서 다시 다산초당으로 거쳐를 옮겨 4년을 지낸다. 이때 자신이 묵던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짓고 생각, 용모, 언어, 행동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사의지재(四宜之齋)라고 했다. 첫 번째는 생각을 맑게 하고, 용모는 엄숙하게 하고,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고, 행동은 무겁게 해야 한다. 지금의 사의재는 2007년에 강진군에 의해 복원되어 한옥 펜션이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에 소나무 뿌리가 있는 길이 있다. 초당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척박하고 바윗돌이 많은가를 알 수 있다. 초당은 바위가 많지만 산을 넘어가면 부드러운 흙들도 많고 백련사앞에 강진만도 펼쳐진다.

1801년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목숨을 겨우 건지고 11월에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전남 나주의 율정(栗亭)의 주막거리에서 서로의 이별을 슬픈 시로 남긴다.


다산은 멀지 않은 백련사를 자주 들리고 해남 윤씨의 산정이 있는 곳에 자주 출입하면서 윤씨들과 접촉하면서 거처를 옮긴다. 1808년 봄 귤동 마을에 있는 해남 윤씨 집안의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옮긴 후 여기를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당호를 내건다.


다산의 어머니가 윤두서 손녀이고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이다. 이 귤동마을은 해남 윤씨의 외가 쪽이다. 다산의 외증조부가 공재 윤두서이다. 윤단과 윤규노 부자가 중심이 되어 윤단의 손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다산을 초빙한다.


그래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무덤에 윤종진의 묘가 있다. 윤단의 묘자이면서 다산의 제자이다. 일반적인 무덤과는 달리 세워진 동자석들이 지역의 특색을 띠면서 집안의 획일성을 피하기 위한 모습을 띤다.


참고로 윤선도가 있었던 곳은 여기에서도 더가서 배로 이동해야하는 완도 보길도의 사진과 영상을 몇장 올린다.

보길도 세연정

보길도의 세연정은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 당시 왕이 항복했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다가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감동하여 머물렀다고 한다. 그가 인조 15년(1631년) 51세때부터 13년간 글과 마음을 다듬었던 곳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연못과 정자가 조화가를 이루고 있다.

세연정


보길도 세연정 영상

서암은 다산의 제자들이 머물고 수업자료를 준비하고 수업이 끝나면 돌아와 스승의 말씀을 정리하고 토론한 방이다. 서암은 다산의 사상과 개혁안이 500권이 넘는 책으로 엮었고 학문의 이름을 얻은 다산학의 산실이다. 다산의 저작은 황상을 비롯한 사의재 시절 제자와 해남 윤씨 자손으로 이루어진 제자 18명의 공이다. 나중에 주모의 딸 홍임 어미도 귤암마을로 들어와 뒷바라지하였다. 다산이 늘그막에 홍임을 본 것도 초당에서였다.

원래 다산초당을 안내하는 표지석이었던 것 같은데 새로운 금속제 안내판에 밀려 건물 한구석에 몰려 있다. 오래된 블로그에 올려진 사진을 보면 이 표지석들로 구성되어 있다.

1957년 다산유적 보호회에서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좌우 동암과 서암을 복원했다. 다산초당이라는 글씨는 김정희의 친필을 모각(模刻)해서 현판을 매달았다고 한다. 초당(草堂)이라함은 풀과 볏짚으로 만든 초가이다. 원래 초가였던 건물들을 기와집으로 복원을 한 형태이다.


(蓮池石假山)다산이 강진 유배 초기에 8년 동안 진전하다 다산초당을 얻고 무척 기뻤다. 우물을 파고, 연못도 꾸미고, 초당을 방문하는 사람을 위해 초당 앞에 넓적한 바위위에 솔방울로 차를 달였다. 다산초당 4경에 정석(丁石), 약천(藥泉),연지석가산, 다조에는 다산의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 녹아있다. 정석은 다산의 성을 따서 정(丁)이라는 글을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뜻으로 새겼다고 한다. 초당과 동암 사이에 연못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하여 손수 돌을 쌓아서 산으로 가짜 돌산으로 이름을 붙였다. 다조는 초당앞의 넓은 바윗돌인데 이 돌위에 솔방울을 두고 불을 지펴서 찻물을 끊여 마시거나 손님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초당 오른편에 있는 조그마한 연못이다. 바윗돌을 가져다 산처럼 만들었고 연못에는 잉어를 키워서 잉어를 보고 날씨를 예측했다고 한다. 해배이후에도 제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다산동암의 현판은 다산의 글을 집자(集字)하여 만든 것이다. 저술에 필요한 책을 갖추고 손님을 맞이한 사랑책 역할을 했던 곳이 동암이다.

다산초당에서 오른쪽 건물 동암은 2,000여 권의 책을 두고 연구에 몰두한 다산의 서재이자, 연구실이고 손님을 맞는 사랑방이었다. 해남 윤씨의 어초은 파 종가인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의 스승 효종이 하사한 수원의 집 일부를 해남으로 올 때 뜯어 다시 지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었는데 윤선도 집안의 빅데이터인 장서를 이용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이었다. 다산초당에서 공부하던 다산에게 윤씨 집안의 장서가 그 바탕을 이루었다.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정약용(丁)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김정희의 글이다. 다산이 유배시절의 제자 윤종진이 추사를 찾아와서 당호를 부탁했다 한다. 그림의 구도를 잡듯 글씨를 쓴 추사의 멋이 보인다.

공부하다가 나오면 강진만을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 나온다. 지금은 그 자리에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천일각에서 백련사 가는 오솔길이 있다. 나무들이 많이 자라서 시원하게 보이는 풍경은 아니지만 강진만을 바라볼 수 있다. 나무가 많이 없던 시절에는 훤이 내다보이던 풍경이었으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고갯길

다산과 혜장이 얼마나 많이 이 길을 오고 갔을까? 밤에도 햇불을 내세우며 오고 갔다고 하니 그들의 이야기가 들여온다. 거리로는 1km가 되지 않지만 산의 오솔길이라 일반적인 걸음으로 시간을 재어보니 3-40분정도 걸린다.

백련사정경

백련사의 뒷산이 만덕산이고 동백림을 걸어가서 차밭을 지나서 왼쪽으로 둘러 넘어가면 다산초당이 나온다.

다산을 알아봐 준 이가 백련사의 해장 선사이다. 해남 대둔사 혜장은 당대 최고의 학승으로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혜장의 도움으로 고성사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옮긴다(1805). 다산은 유교와 주역의 경전 이야기로, 혜장은 차 이야기로 서로가 많은 교류를 했지만 아쉽게도 혜장은 1811년 40세 이른 나이에 입적을 한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이라고 불린 곳이다. 다산이 기거한 초당으로부터 약 1㎞ 남짓한 길을 걸으면 3~4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을 서로 왕래하였다. 초당의 다산이 걸으면 ‘백련사 가는 길’이며, 백련사 혜장이 걸으면 ‘다산 초당가는 길’이 된다. 다산이 한밤에 횃불을 앞세우고 걸었다는 기록도 있다. 백련사 가는 길에 차밭이 있고 이 만덕산의 다산에서 정약용은 호를 짓는다. 백련사 동백은 1,500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이다. 2월 말부터 3월에 걸쳐서 꽃을 피우니 아직은 만개하기에 이른 시기였다.


백련사로 부터 서남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 해남 대흥사 암자 일지암이 있다. 그곳에 사는 초의 선사에게 차를 배웠다. 대신 다산의 만남은 1809년이었다. 다산보다 20살 아래의 초의는 다산에게 주역과 시학을 배웠다. 다산에게는 혜장과 초의선사가 벗이면서 스승과 제자였다. 한국의 다도의 시조를 초의선사로 볼 때 다산이 차를 마신 다도가 한국의 다도이다. 참으로 소박하고 정갈한 다도이다. 일본의 다도와는 달리 절차나 기법 그리고 다양한 다기들 없이도 마실 수 있는 심플함의 미학은 어디서 왔을까? 강진의 청자 빛 다양한 도자기와 다산의 풍부한 찻잎 그리고 맑은 물과 풍경이야 말로 차 맛 그 자체였으리라.


다산이 그토록 많은 저작물들을 남길 수 있었던 환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배된 땅에 천혜의 자연환경, 그리고 혜장과 초의선사, 그를 따랐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러한 환경과 수많은 정보로 둘러쌓인 빅데이터, 그리고 협업을 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