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ro Jun 25. 2020

의사의 품격

내가 병원을 옮기고 나서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의사들의 복장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서울대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다수의 의사들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하고 다녔고 거의 모든 의사들이 구두를 신었다. 그래서인지 병원을 옮긴 후 다른 교수님들이 가운 안에 니트나 스웨트 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고,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어색하지 않게 되었고, 어색하지 않게 되자 그것이 훨씬 더 편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복장을 바꾸기로 했다. 검은색 스니커즈를 신기 시작했고, 캐주얼 셔츠와 니트, 여름에는 피케셔츠를 주로 입고 다닌다. 그리고 여전히 누구도 복장에 대해서 지적을 하지 않는다.

뭐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이건 조직의 경직성 혹은 유연성과 관련해서 분명히 생각해 봄직한 문제인 듯하다. 의사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혹자는 환자에 대한 예의라고 말하는데, 꼭 와이셔츠에 넥타이가 아니더라도 깔끔한 복장이기만 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되지 않을까? 그저 예전부터 그렇게 입어 왔으니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으니까 이전 관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이유로 앞머리 삼센치 뒷머리 막깎기라는 교칙을 21세기가 되던 해에도 유지했던 나의 모교 고등학교처럼.


아직 여러 과에 관심이 많던 인턴 시절, 외과계 모 과 인턴이었던 4월 한 달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군대식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과 분위기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혹은 남색 계통의 넥타이, 검은색 계열의 정장바지, 검은색 정장구두를 강요하는 복장 규정도 한 몫 했다. 혈액 샘플은 물론이고 관장이나 도뇨관 삽입 등 온갖 수기를 해야 하는 인턴의 입장에서 가운 복장은 전투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전투복 안에 흰색 와이셔츠와 넥타이, 정장바지, 거기다가 정장구두라니!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수기를 불편한 복장으로 해내느라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고, 스케줄까지 바꿔가며 친해져 보고자 했던 해당 과는 4월 인턴이 끝남과 동시에 완전히 마음에서 멀어져 버렸다.

외과는 복장에 대한 규제가 상대적으로 덜하기는 했지만 와이셔츠에 넥타이, 구두를 착용하기를 원하는 것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수술복 위에 가운을 입고 다니는 것은 용인해 주었기 때문에 전공의 1년차 시절에는 거의 365일 내내 수술복만 입고 다녔다. 개중 유난히 전공의들의 복장에 깐깐하게 구시던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만 보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시는지 온갖 트집을 잡아 혼내곤 하셔서 저 먼발치에서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다니고는 했었다. 하루는 더 이상 혼나서는 안 되겠다 오늘은 정말 잘 해 봐야지 마음을 먹고 평소에 입지 않던 와이셔츠까지 갖춰 입고 회진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후 교수님을 기다렸다. 마침내 병동에 모습을 드러내신 교수님은 아니나 다를까 나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셨다.

“인마 너는 그래서 되겠어? 앙?”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갖추고 막 가운실에서 가져온 가운까지 입고 있는데 뭐가 문제일까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한 마디 덧붙이셨다.

“의사가 검은색 와이셔츠를 입으면 환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저승사자라고 느끼지 않겠어? 앙?”

말문이 턱 막혔다. 별 걸 가지고 다 뭐라고 하는구나. 검은색 와이셔츠가 저승사자처럼 보인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었다. 하얀거탑에 나오는 김명민은 검은색 와이셔츠 잘도 입던데 말쑥하고 스마트해 보이기만 하더구만. 유행 따라 나도 한 번 입어 보겠다며 검은색 와이셔츠를 구입한 내 자신을 원망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지만 검은색 셔츠를 입은 의사는 저승사자처럼 보일 것이라는 말에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 아무런 대답도 안 하고 입만 삐죽거리고 있었더니 교수님이 지적 하시는데 듣고 있는 태도가 불량하다며 여지없이 깨졌다. 아 나는 이 사람과는 도저히 궁합이 안 맞아서 같이 일을 못 하겠구나 절실히 깨닫고는 똥을 피하는 심정으로 남은 4년 내내 피해 다녔다.


나는 혁신적인 생각은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조직 구성원들이 경직된 사고에 얽매여 있어서는 발전하는 조직이 될 수 없다. 병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넥타이는 결혼식 하객으로 갈 때나 맬 일이다. 넥타이는 의사에게는 각종 감염병의 매개체일 뿐, 의사에게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강요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다. 캐주얼 셔츠 차림으로도 깔끔한 인상을 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실력 있는 의사이지, 격식을 차리는 의사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분노조절장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