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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14. 2020

아무렇지 않아요

지난 주에는 혼자서 TV를 보다가 울었다.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미스터트롯>을 보다가 울었다. 밤샘 응급수술과 이어진 세 건의 정규수술이 끝나고 지쳐 집에 돌아와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 거실 소파에 혼자 앉아 멍하니 넋 놓고 티비를 보다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갱년기도 아닌데 눈물이 많아지는 것 같다.

TV에서는 초록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등장해서 방방 뛰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채 개그맨 출신이라는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저렇게 뛰면서 노래를 부르는 게 쉽지 않은데 잘하네. 심사위원들로부터 만장일치 합격을 받았다. 뭐, 저 정도면 잘 했으니까. 그런데 남자는 이어진 인터뷰에서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제가 얼마 전에 크론병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받았어요.”

남자는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원래 더 잘 뛰어다니거든요. 그런데 수술 받은 이후로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운동을 아무리 해도 체력이 회복이 안 돼요. 2분 무대 하는데 잘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그런데 올하트를 받을 줄은……”

남자는 감정이 복받쳐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는 안다. 예전과 같지 않아 속상한 그 기분, 나는 안다. 건강했던 예전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절망과 두려움,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남자의 춤이 슬로우모션으로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남자는 정말 이를 악물고 춤을 췄다. 의심과 두려움을 감추고 모든 것을 바쳐 노래를 하고 춤을 췄다. 한잔 하라며 신명나게 권주가를 불러 제꼈다. 신명 뒤에 숨은 남자의 간절함이 절절히 전해져 나는 울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요?”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의 첫 마디는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내가 마른 것은 사실이고,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말라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처럼 마르기 전 모습만 기억하는 지인들은 예전과는 다르게 삐쩍 마르고 핼쑥한 내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고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할 테니 그들이 그렇게 물어 보는 것이 이상한 건 아니다. 그들의 의도가 악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다만, 내가 말랐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 주는 그 상황이 너무나 싫을 뿐이다. 

“다이어트해요.”

피식. 웃어 넘긴다.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요? 아픈 거 맞아요. 사실은 제가 크론병 환자입니다. 만날 배 아프고 설사하는 병이고요, 당연히 살이 빠져요. 살만 빠지는 게 아니라 체력도 같이 떨어져서 남들보다 빨리 지쳐요. 자,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지치고 힘들다는 사실보다도, 남들의 눈에 내가 힘들게 비치는 것이 더 싫다. 어제 <미스터트롯>에서 이를 악물고 춤을 추던 초록색 정장의 남자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비록 크론병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병을 진단받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는 여전히 노래하고 춤을 출 것이고,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나는 그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다. 


이봐요, 당신 잘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잘 하고 있으니, 우리 같이 잘 해 봅시다.


영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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