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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29. 2020

의사에게 사명감을 강요하는 세상

<28> - 정유정

정유정의 소설 <28>은 인간을 포함한, 살아남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염병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 세상을 그려내고 있는 <28>은 다양한 등장인물과 동물들의 속내까지 드러내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고뇌와 분노, 그 극복을 뜨겁게 묘사한다. 처절하고, 비장하다.

책을 덮을 때까지 느껴지는 긴장감과 분노, 무력감이 비단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내가 유독 이 작품에 감정이 이입되어 다시 펼쳐 보기조차 힘들었던 건, 극한의 의료적 재난 속에서 고민하는 의료진의 번뇌가 가슴 절절히 와 닿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장 감정이입을 했던 대상은 재형도 기준도 링고도 아닌 감염내과 과장 박남철과 간호사 노수진이었다. 의료진의 숙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이들의 운명.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국가적인 의료 재난 상황에서 의료진들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열악한가를 뼈저리게 느꼈기에, '그럼에도 병원을 끝까지 떠나지 않는' 이들의 선택이 더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가끔씩 그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전쟁이 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병원이 가장 안전하다고 하니 병원을 지켜야 하나? 밀려드는 환자들을 위해 숭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내 가족들은 어쩌고? 가족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의사로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일까?


메르스에 이어 이번에는 우한폐렴이 난리다.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네 어쩌네 말이 많지만, 가장 위험에 처해 있는 건 누가 뭐래도 일선의 의료진이다. 아직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 미지의 병과 맞서 싸우고 있는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런가. 지난 메르스 사태 때 의료진들이 느낀 허탈함과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다. 열심히 환자 진료하고 메르스 환자를 이송한 죄밖에 없는 개인 의원들이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고, 메르스를 진단해 낸 공로를 인정받아야 할 삼성서울병원은 오히려 과징금을 부과받고 손실보상금을 지급받지 못해 복지부와 소송중이다. 고생은 의료진이 다 하고, 생색은 보건복지부가 낸다. 그러면서도 일이 터질 때마다 의사들만 옥죄고, 비난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주대병원 외상센터 문제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국민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이국종 교수님 짱짱맨, 아주대병원장 쓰레기로 모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정말 그럴까? 내부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의사들의 의견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한 사람의 영웅이 - 이국종 교수님이 영웅이 맞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 이끌고 가는 의료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국민들은 일 년 내내 병원에서 살면서 환자들과 씨름하는 이국종 교수님 같은 의사를 추앙하고, 너희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냐며 다른 의사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뒷받침이 안 되는데 의사의 열정을 갈아 넣어서 유지되는 의료가 과연 바람직할까? 시스템 내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의사가 정말 나쁜 것일까?  


연이은 응급수술로 이삼일씩 집을 비우게 되는 때가 있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가면 아내 역시 녹초가 되어 있다. 둘째가 아직 어려 아이 둘을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편에게 어리광부리기 좋아하는 아내가 한 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 목숨만 구해줄 게 아니라, 내 목숨도 좀 구해 줘. 내가 먼저 죽을 거 같아.”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는 아내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냐고 응급 환자들을 위해 기꺼이 밤샘 수술을 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가치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병원은, 또 국가는 그런 노력에 대해 적절히 보상해 주지 않는다. 국민들은 의사라면 환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의사들을 사명감이 부족하고 돈만 밝힌다고 매도한다. 자, 언제까지 의사에게 의사로서의 사명감만을 강요할 건가? 


의사도 의사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사명감만으로 일하기엔 나 역시 나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 매 순간 고뇌한다. 나는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 환자들에게, 또 내 가족에게. 


좋은 의사로 살면서 동시에 좋은 아빠가 되기란 참 어렵고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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