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세사리를 좋아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목걸이를 하고 다녔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귀를 뚫었다. 반지는 기본이고 손목시계와(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염주도 끼고 다녔다. 대학 때는 염색도 꼬박꼬박 했었는데 노랗게도 해보고 빨갛게도 해보고 그랬더랬다. 그땐 어디까지나 젊었고 그러고 다닌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자유롭던 시절이었다.
본과 3학년 여름방학때였다. 병원 실습을 시작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귀걸이를 빼고 다니다가 방학이 되자마자 다시 끼고 다녔다. 내과 실습 도중 여름방학이 끼면서 방학 중에 실습 관련하여 교수님과 면담을 가질 일이 있었는데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교수님께서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셨다.
"어럽쇼!"
어럽쇼라니, 책에서나 보던 저런 감탄사를 실제로 쓰는 사람이 있구나. 잠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뒤늦게 교수님 시선이 내 왼쪽 귀를 향해 고정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차, 귀걸이.
허둥지둥 귀걸이를 빼는 나를 교수님께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계셨다. 그 때는 '어럽쇼'라는 감탄사에 정신이 혼미해져 내가 정말 잘못을 한 건지 어떤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귀걸이를 얼른 빼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나중에야 생각해 보니 귀걸이를 한 것이 정말 그렇게 큰 잘못인가 싶었다. 환자 앞에서 끼고 다닌 것도 아니고, 방학인데, 교수님 앞에 귀걸이를 하고 나타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80년대도 90년대도 아닌, 무려 200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이다. 그만큼 의사들의 사고는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었다.
외과 의사가 된 이후로는 그나마 끼고 다니던 시계와 반지도 뺄 수밖에 없었다. 시계와 반지는 그 자체로 오염원이기 때문에 수술을 할 때 끼고 들어갈 수는 없다. 다 빼고 손을 깨끗하게 소독한 후 멸균 수술복과 장갑을 껴야 한다. 그렇다고 수술 들어갈 때마다 빼고 수술 끝나면 다시 끼고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하는 분들은 세탁실로 온 수술복 주머니에서 잃어버린 반지와 시계가 얼마나 많이 발견되는지 몰라서 그런 것이다. 나도 반지를 하나 잃어버리고 커플링마저 잃어버릴 위기에서 세탁물을 뒤져 겨우 찾아내고 난 이후에는 시계와 반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혼반지를 신혼여행 이후로 껴 보지 못하고 벽장에 묻어둔 채 8년이 지난 어느 날 생각했다.
'어차피 벽장 속에만 보관해 둘 거라면 잃어버릴 우려가 있더라도 끼고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벽장 깊숙이 숨겨 두었던 반지를 찾아 내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손가락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의 반짝거림이 좋았다. 그래, 끼고 다니자. 유부남이 총각 행세하려 한다는 오해를 벗기 위해서라도, 끼고 다니자.
그 후로 일 년, 다행히도 아직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며 문득 생각한다.
내일 귀걸이를 하고 나타나면 환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언젠가 대학병원에서 왼쪽 귀에만 귀걸이를 한 남자 의사를 만나더라도 부디 놀라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