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눈 한 번 내리지 않더니 첫눈으로 폭설이 내렸다. 눈 예보가 있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서두른 덕에 무사히 출근하긴 했지만, 눈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왔다. 평소 십오 분 걸리던 출근길이 삼십 분이나 걸리긴 했어도 하얀 눈으로 뒤덮인 무등산을 끼고 달리는 출근길은 기분이 꽤나 상쾌했다.
의료계 속어 중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다. 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비가 많이 내리면 ‘굳이 이 비를 뚫고 가는 수고를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경증 환자들의 응급실 방문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이 말은 경험적으로 매우 사실이다. 이 법칙은 눈이 많이 내릴 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다만 눈이 내리면 낙상 환자는 많아지는데, 외과 의사의 입장에서 신경쓸 일은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 눈보라를 뚫고 기어이 응급실로 오는 환자는, 상당히 중환인 경우가 많다.
아침 컨퍼런스 때, HR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치프는 이제 얼마 안 남았네. 2주 남은 기간 동안 될 수 있는 한 많이 배우고 가도록 해. 응급도 많이 해 보고.”
응, 급, 도, 많, 이, 해, 보, 고, 라니. 교수님께서 “요즘은 응급이 영 뜸하네”, “병동 입원 환자가 너무 적은데?”, “요새 병동이 참 stable하다” 따위의 말을 하신 날은 신기하게도 어김 없이 응급 수술이 생기곤 했다. 그야말로 응급 수술을 부르는 주문이었다. 오늘은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주문이다.
“응급도 많이 해 보고.”
교수님, 오늘은 제가 당직입니다만. 허허허.
창밖에는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교수님의 주문과 ‘유설무환(有雪無患)’의 법칙. 과연 어느 기운이 더 셀 것인가?
수술이 급하지 않은 협진 환자 수술을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기필코 해가 지기 전에 저 눈보라를 이겨내고 퇴근하리라 의지를 불태우던 참에, 전공의에게 전화가 왔다.
“로컬에서 전원 문의가 하나 왔는데요.”
뭔가 음산한 기운.
“colon perforation으로 인한 panperitonitis라고 합니다.”
아, 불길한 예감은 어찌 이리도 틀리지를 않는지. 힘이 쭉 빠진다. 우리 병원은 전원 문의의 피라미드가 있다면 그 꼭대기에 위치한 병원이어서 전원을 받지 않을 수도 없고 보낼 만한 다른 병원도 없다. 한숨을 푹 내쉬고 마지못해 말했다.
“……오시라고 하세요.”
교수님의 주문은, 눈보라를 뚫고 기어이 응급실로 올 수밖에 없는 중환을 불러 들이고야 말았다.
창밖에는 눈이 한창이고, 해는 저무는데, 나는 응급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