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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Feb 24. 2020

응급실에서

십수 년 전, 어느 응급실 인턴의 기록

<ER>이라는 미드를 본 사람은 응급실이라는 곳에 대한 막연한 환상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실려왔던 사람이 멀쩡히 일어나서 걸어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태반이다.


1.

한 사람의 생을 내 손으로 마감한다는 것.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의 죽음을 선고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실제로 겪어 보기 전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어느 날. 대충 환자가 정리되고 좀 쉬어 볼까 하던 자정 무렵, 앰뷸런스 한 대가 도착했다. 밀려드는 짜증과 함께 샘플 하나를 마저 끝내고 돌아와서 보니 DOA(dead on arrival. 도착시 사망) 환자다. 허걱.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대고 있던 내게 응급실 수간호사님이 친절하게 해야할 것을 일러주셨다.

“호흡 확인하고, 맥박 확인하고, 사망선고 내리시면 됩니다.”

이미 죽어서 온 게 뻔한 환자이지만 그래도 형식적인 절차는 거쳐야 하는 법. 이미 온기를 잃은 목덜미에서 맥박을 건성건성 확인하고 사망 선고를 했다.

“아무개씨, 5월 X일 23시 57분, 사망하셨습니다.”

그렇게, 내 세 치 혓바닥으로, 아무개씨의 삶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미 아무개씨가 사망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보호자들은, 내 말 한마디에 다시 오열하며 환자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한 인간의 삶이 끝나는 순간이 의사의 말 한마디로 결정된다는 사실, 생과 사를 가르는 중대한 결정이 일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려진다는 사실이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5분만 더 늦게 사망선고를 했으면 아무개씨의 기일이 하루 늦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뭐라고 그런 권리까지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한 사람의 생명이 떠나갔고, 나는 잠깐의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또다시 밀려드는 환자들과 씨름해야 했다.


2.

유난히 바빴던 어느 금요일 오후. 예순이 훌쩍 넘어보이는 할아버지가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면서 119에 실려왔다. 평활근육종(leiomyosarcoma) 환자다. 그냥 집에 있던 중에 갑자기 터져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소 500cc 정도는 쏟아진 듯하다. 이런 환자는 꼭 주말에 와서 나를 곤란하게 한다.

정형외과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던 환자예요. 특별히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드레싱 잘 해서 집에 보내드리고 예정된 날짜에 입원하라고 하세요.”

특별히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다니.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환자가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 해 줄 것이 없다니. 이제 갓 의사 면허를 따고 내가 세상의 아픈 사람들을 구하리라는 굳은 결의에 찬 5월 인턴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다. 예정된 입원일은 아직 열흘이나 남았고, 출혈은 멎은 듯 안 멎은 듯 조금씩 계속해서 거즈를 적시고 있었다. 복통도 있다고 하여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장이 가스로 가득하다. 마비성 장폐색(paralytic ileus)이 온 듯했다. 도저히 드레싱만 하고 집에 보낼 수 없어 수혈도 하고 관장도 하고 아침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아침이 되자 증상은 약간, 아주 약간 호전되었다. 출혈은 그럭저럭 멎긴 했지만 여전히 꽁꽁 싸맨 거즈 사이사이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과연 그냥 퇴원시켜도 될지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오늘은 토요일 아닌가. 다시 전화 드려 봐야 정형외과 선생님의 결정이 바뀔 리는 만무하고 그렇다고 주말 내내 환자를 응급실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퇴원 확인도 받았겠다, 증상도 '약간' 호전되었겠다, 그냥 냅다 퇴원시켜 버렸다.

닷새 뒤.

그 환자 생각만 하면 마음 한 구석이 못내 찝찝하더니, 할아버지는 결국 출혈이 심해져 응급실로 다시 내원했다. 이번에는 혈색소 수치가 겨우 5.5다. 거 봐, 내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내 주관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환자에 대한 ‘객관적인’ 의학적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정형외과 교수님에 의해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는’ 것으로 확정된 환자는, 더 이상의 조치는 무의미하다는 소견서와 함께, 호스피스로 전원되었다.

내 얼굴만 보면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고마워하던 보호자 얼굴이 떠오른다. 환자를 굉장히 위하는 것처럼 잔뜩 포장해서 말했지만, 실은 별로 해 준 게 없다는 걸 그 보호자는 알고 있었을까.


3.

어제 근무 중 환자 한 명이 사망했다. 말기 암환자이긴 했지만 ICU에서 집중치료를 하면 최소한 한 달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환자였다. 그러나 보호자의 의지가 너무 단호했다. 결국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 거부 서약서) 동의를 받은 상태에서 산소호흡 등의 기본적 처치만 받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둔 환자를 보면서 내가 과연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최선이었을까? 고집을 피워서라도 좀 더 살아있도록 해 드리는 게 좋지 않았을까?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루라도 더 살아 내셔야 한다고 설득해야 옳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환자의 앙상한 몸뚱아리를 보며, 그 옆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지키고 있는 지친 보호자들을 보며,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저것 생각하기엔 내 심신이 너무 피곤했고,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대퇴동맥(femoral artery) 통한 ABGA를 처음 시도해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손이 많이 가는 환자가 사망해 버려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생각이 불경스럽게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서 계속 꿈틀댔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멀었다.

제 몸 하나 편한 것만 찾는 인턴 나부랭이를 용서하시고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4.

응급실 근무를 한 지 열흘 정도 지났을까. 한 환자가 이가 아파 견딜 수 없다며 응급실을 찾았다. 여느 치과에서 암환자 발치를 꺼린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허나 공교롭게도 그 날을 토요일이었고 -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외래가 아닌 응급실을 찾았겠지만 – 당연히 병원에 치과 교수님은 한 분도 계시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는 '국립암센터'가 아닌가. 치과 선생님들이라고 해봐야 몇 분 되지도 않을뿐더러 구강종양 환자를 보지 발치 환자를 보지는 않는다. 정말로 발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정식으로 협진 의뢰를 해서 치과 진료를 보려면 월요일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설명하고 환자에게 인근 병원으로 가시기를 권유했더니 환자 보호자가 막무가내다. 이가 아파서 왔는데 치과 선생님께 연락도 한 번 안 해보고 다른 병원으로 가라는 게 말이나 되냐는 거다. 뭐 보호자 입장에서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우리 병원 시스템이 그런 것을 어찌하랴. 상황이 이러저러해서 어쩔 수 없다고 잘 설명해 드렸지만 여전히 막무가내다. 치과 교수님께 연락을 드리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기세다.

어쩔 수 없이, 안 될 줄 알면서도, 치과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치통을 심하게 호소하는 위암센터 환자가 꼭 오늘 진료를 보고 싶어 하시는데 혹시 가능하실지요?

“아, 어떡하죠? 제가 지금 개인적인 일로 경기도 광주에 와 있어서요.”

거 봐.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지 뭐.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다른 병원으로 전원 보내겠노라고 말씀드렸더니 치과 교수님의 다음 말씀이 압권이다.

“환자가 그렇게 아파하는데 어쩔 수 있나요. 다른 병원 보내서 꼭 발치가 가능하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가서 진료를 보겠습니다.”

그렇게 치과 교수님께서는 경기도 광주에서 일산 암센터까지 두 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환자 한 명을 위해 되돌아오셨다. 그것도, 토요일에.

의사가 되려면 저런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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