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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May 23. 2020

부모된 자의 마음이란 무릇

대학 시절 나는 산악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인수봉 의대길을 개척하신 선배님들의 뜻을 이어 받아 암벽등반을 목표로 하는 정통 산악부였지만 동아리 본연의 목적보다는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주된 관심사였던 나는 동아리 활동 자체는 게을리 했다. 그러면서도 방학 때마다 떠나는 원정 산행은 웬만하면 빼먹지 않고 참석했는데, 설악산 능선 종주도 하고 백두대간 종주도 하고 여하튼 일주일씩 산에 틀어박혀서 먹고 자는 것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 고된 하루 산행을 마무리하고 텐트에 오손도손 둘러 앉아 소주 한 잔씩 나눠 들고 산새소리 바람소리를 벗삼아 뽑아 대던 노랫가락 한 자락 한 자락이 그렇게도 좋을 수 없었다.

나의 원정길에 놓인 단 하나의 장애물은 부모님이었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이신지라 산악부 활동 자체를 싫어하시지는 않았지만 겨울 원정은 절대 불가 방침을 고수하셨다. 예과 1학년 때는 운세까지 들먹이시며 겨울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도 성화를 부리시는 통에 방학 내내 대구에 붙들려 있어야 했고, 예과 2학년 때는 본과 준비 스터디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부모님 몰래 다녀왔었다. 그 이듬해에는, 거짓말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몰래 다녀온 것까지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꼭 가고 싶다고, 가야 한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아버지는 완강하셨다.

“절대 안 된다.”

“아버지,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그래도 안 돼.”

“위험한 짓 안 한다니까요. 왜 이리 걱정이 많으실까.”

“니는 아직 부모 마음 모른다. 니도 부모 돼 봐라 인마.”

“그럼 허락하시는 것으로 알고 다녀 오겠습니다.”

“몰라. 아빠 화났다.”

쉰이 넘으신 아버지는 스물 두 살 아들에게 정말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전화를 툭 끊어 버리셨다. 아직도 내가 애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영 마음이 불편했지만 나는 도저히 겨울 원정의 낭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행히 별 탈없이 겨울 원정은 끝이 났고 (그 해 원정이 산악부 활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었다), 무사히 다녀온 이후에야 아버지는 어느 정도 누그러지셨다.


몇 해가 지나 나는 졸업을 했고, 의사 면허를 땄고, 연애를 했고, 결혼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 심정을 안다.’

아비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아들 하나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쏟아 붓는 사랑과 헌신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육아였다. 세상 모든 부모는 위대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내가 아비가 되고 나니 그 생각은 실로 같잖은 것이었다. 아비가 되기 전에는, 어미가 되기 전에는 부모의 사랑을 절대 알 수 없다. 느낄 수도 없고 설명해 줄 수도 없다. 부모의 사랑이란 오로지 부모가 되어 직접 그 사랑을 베풀어 보아야만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왜 그렇게 겨울 원정을 반대하셨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스무 살 넘은 아들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여기셨는지도 내 스스로가 아비가 되고 나서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아비가 되고 나니 뉴스 하나하나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어린이집에서 아동 학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어린이 실종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나는 가슴을 쳤고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난 무렵엔 뉴스를 보기가 두려웠다. 문득 생각날 때마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내 아이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내가 이런데, 당사자인 부모님들의 애끊는 마음이야 오죽할까.


몇 해 전 봄, 20년지기 친구의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전임의로 근무하던 시절,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막관낭종이 뭐냐고 했다. 요막관낭종은 방광의 발생 과정에서 정상적으로는 막혀야 되는 구조물이 출생 후에도 남아 있는 질병인데, 염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수술을 해 주어야 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동생이 혈뇨가 있어서 검사를 했는데 요막관낭종이 발견되어서 수술을 받는단다.

“수술은 꼭 해야 돼. 염증이 반복해서 생기고, 드물긴 하지만 암 되는 경우도 있거든.”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이 말을 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병리검사결과 요막관암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입이 방정이지, 괜한 말을 했다. 왠지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가끔씩 들려오는 소식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재발했다고 했고, 복막파종이 생겼다고 했고, 항암도 중단하고 쉬고 있다고 했고, 복수가 차서 힘들다고 했고, 흉수가 차서 숨이 가쁘다고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근무시간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무시간에 전화라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왜 무슨 일이고.”

친구는 전화를 걸어 놓고 아무 말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흐느낌이 전해졌다.

“……어딘데.”

“아이다, 바쁜데 무리해서 먼 길 안 와도 된다.”

미친 놈. 지랄하네.

“카톡으로 주소 찍어놔라. 이따가 저녁 늦게 갈게.”

오지 말란다. 미친 놈. 또라이같은 새끼. 전화를 끊고 한바탕 욕을 했다. 친구에게 하는 욕인지, 나 자신에게 하는 욕인지, 세상을 향해 하는 욕인지 대상조차 불분명한 욕지거리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장례식장을 다녀오는 마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달빛조차 없는 고속도로는 유난히도 쓸쓸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버릇처럼 되뇌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바보같이 내가 왜 우는 거야. 애써 진정해 보려 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운전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상등을 켜고 때마침 나타난 졸음쉼터에 차를 정차시켰다.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들썩이며 울었다. 동생을 잃은 친구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었다. 터져버린 눈물은 자식을 잃은 친구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이었다. 장례식장 골방 문을 굳게 닫고 넋이 나간 채로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잔영이 계속 맴돌았다. 대한민국 의사 면허를 가진 자로서 갓 서른 된 젊은이를 암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다는 근원적인 죄책감이 지워지지를 않았다. 내 탓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내 탓이 아닌 것이 아니었다. 형 친구가 의사이면 뭐해. 결국은 아무 소용도 없어. 누군가의 소리 없는 외침이 환청처럼 울렸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마치 통속 소설의 클리셰처럼, 몇 달 후 친구의 딸이 태어났다. 삼촌이 세상을 떠나며 선물해 준 사랑이요, 축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왠지 정말로 그런 것만 같았다. 무릇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친구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한 구석이 아리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장례식장에서도 손만 맞잡고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지만,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다. 분명 좋은 곳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겁니다. 무럭무럭 자라는 조카를 보며 미소 짓고 있을 거예요. 꼭 그럴 거라고 확신합니다. 분명히 그럴 거예요.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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