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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Mar 08. 2020

똥주머니를 차고 산다는 것

장루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내가 다니던, 당시 대구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영어학원의 원장이 한 몇 달 보이지 않았는데 원생들 사이에 이런저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둥 모 선생님과 눈이 맞아서 도망갔다는 둥 하나같이 신뢰할 수 없는 소문들이 말 옮기기 좋아하는 아이들에 의해 퍼져 나갔다. 그 중에서도 당시 내가 제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원장 선생님이 큰 수술을 받고 항문으로 대변을 보지 못해서 똥주머니로 대변을 받아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세상에 사람이 똥주머니를 차고 어떻게 사냐고 뻥치지 마라고 대번에 묵살해 버렸다. 그 소문을 가져온 당사자도 본인도 들은 이야기라며 얼버무리는 것이 본인 입으로 말하면서도 사실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근거 없는 소문들 중에서 쓸데없이 구체적인 데다가 초등학생이 지어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똥주머니 이야기만은 진실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루에 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그때 그 초등학생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장루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장루가 인공항문이라고 설명을 하면 ‘인공항문’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때문에 항문이 있는 위치에 항문 역할을 하는 무언가를 만들어서 달아주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장루란 곧 배에다가 똥주머니를 차게 된다는 의미라고 설명을 하면 그제서야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똥주머니를 차고도 사람이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주워 들은 단편적인 지식에서 오는 몰이해가 겹쳐, 대다수의 환자들은 장루를 만드는 수술 자체를 꺼린다.


장루를 만드는 수술은, 그래서, 어렵다.




“복원은 절대 안 되는 거지요?”

벌써 같은 설명을 열 번쯤은 한 것 같은데 또 물어본다. 마지막 수술을 하고 나서 이제는 장루 복원은 어렵다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설명한 것이 육 개월 전이었다. 어머니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많은 어머니였다. 장루 복원 수술을 앞두고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글썽였고, 수술 당일 어렵게 복원은 했지만 기능을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에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결국 합병증으로 재수술을 결정한 날에는 아들을 안고 오열했다. 앞날이 창창한 스무 살 아들이 평생 장루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할까?

“네, 복원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잡고 싶은 어미의 심정을 왜 모르랴. 하지만 헛된 희망은 더한 괴로움을 낳을 뿐이다. 나의 냉정한 대답에 어머니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모른다. 짠한 마음을 숨기기 어렵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신이 아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어머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말씀하세요.”

마치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을 하려다 다시 삼키는 것처럼 주저주저하던 어머니가 말했다.

“장애진단서 좀......”

아들이 장애가 있음을 진단해 달라는 말을 꺼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머니의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장애진단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장루장애. 말단결장루. 영구장루. 재판정 불필요.’

전문의 번호를 입력하는 손가락이 유난히 무거웠다. 내가 전자서명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어머니의 스무 살 아들은 서류상으로 공식적인 장루 장애인이 되고 만다. 그것도, 영구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지라도 활자화된 서류를 받아 드는 것은 또다른 의미일 것이다. 마음이 아렸다.

외래 문을 나서려던 어머니가 뒤를 돌아 보고 또다시 물었다.

“복원은, 정말로 안 되는 거지요?”

나는 대답 대신 슬픈 웃음만 지었다.




영화 <관능의 법칙>은 40대의 사랑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는데, 엄정화, 문소리, 조민수라는 주연 배우들의 이름값과 비교적 잘 빠진 만듦새에 비해서는 영화는 그다지 흥행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 조민수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조민수와 이경영은 사랑을 키워 가고, 조민수는 아픈 몸으로 사랑을 해도 되는 것인지 상대에게 상처만 주는 것은 아닐지 고민한다. 조민수가 수술을 받은 후에도 조민수와 이경영의 사랑은 점점 깊어지고 결국 잠자리를 가지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때 장루주머니가 터지면서 침대가 똥바다가 되어 버리고 만다. 장루 전문가로서 내가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것은 바로 그 장면이었다. 더 이상 사랑조차 할 수 없게 된 몸이라고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웅크려 앉아 있는 조민수의 모습이 강하게 각인되어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분명 내 환자들이 겪고 있을 현실 그 자체였다.


<관능의 법칙>에서 장루 환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소 극적으로 그려 내긴 했지만, 장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일상 생활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수영 등의 일부 활동에 제약이 있는 것을 빼면 장루를 가지고도 충분히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 내 환자 중에는 응급으로 대장암 수술을 받고 말단 결장루를 만든지 3주만에 사정(ejaculation)이 잘 안 된다고 호소를 한 경우도 있었으니, 장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문제는 개인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다수의 환자들은, 특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장루를 만드는 수술을 극도로 꺼리는데,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가 크게 한 몫 하는 것 같다. 장루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 어떻게 나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도 못한다고 설명해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 또 한 가지는, 현세의 몸뚱이를 내세까지 가지고 간다는 믿음 또한 장루 수술을 거부하는 이유가 된다. 근무지가 지방 대학병원이다 보니 많이 만나게 되는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특히 그런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배를 째는 수술은 기꺼이 받으면서도, 장루를 만드는 수술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명한 것은, 막상 장루를 만들고 나면 대부분의 환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잘 적응하고 지낸다는 사실이다.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여 새 삶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아이고, 인자 암씨랑도 안 허요.”

장루 가지고 사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냐는 물음에 여든 줄의 할아버지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복회음절제술을 하고 영구장루를 가지고 산 지 벌써 3년이 넘었다. 이제 장루는 그에게 일상이다. 함박웃음을 짓던 할아버지가 한 마디 덧붙인다.

“이랄 줄 진즉에 알았으믄 기냥 곱게 수술 받는 것인디. 나가 원장님 속 좀 솔찬히 썩혔지라잉.”

기억해 주시니 감사하다. 할아버지의 직장암은 항문 근육까지 침범하여 항문을 없애지 않고는 수술이 불가능했었다. 항문을 없애고 평생 장루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에 할아버지는 절대 수술을 받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방사선치료에도 반응이 좋지 않아 종양이 항문을 상당 부분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얼마 못 가서 암이 항문을 완전히 막을 거라고, 대변을 못 보고 배가 불러 와서 응급실로 오시게 될 거라고 아무리 설득하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똥주머니를 차느니 죽고 말겠다며 끝내 수술을 거부했던 할아버지는 결국 몇 달 지나지 않아 응급실로 다시 왔고, 결국에는 처음 계획대로 복회음절제술을 받고 영구장루를 가지게 되었다. 수술 직후 세상 무너지는 표정으로 누워 있던 할아버지가, 3년이 지난 이제는 장루 예찬론을 늘어놓고 있다.

“함 보씨요. 요놈이 을매나 이뿐가. 내 목씸하고 바꾼 것인디 안 이뿌고 배기요? 허허허.”

할아버지가 느닷없이 옷을 걷어 올리더니 장루 주머니 위로 장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너털웃음에 나도 같이 크게 웃었다.

“저 고생시키신 만큼 오래 사셔야 합니다.”

“그라지요잉. 백 살꺼정 살 거싱께 두고 보씨요.”

그래요. 부디 그래 주세요. 장루 그거 별 거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세요. 똥주머니를 차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주세요.

진료를 마치고 일어서는 할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육 개월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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