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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l 31. 2020

자괴감

'내가 이러려고'를 유행시킨 어떤 분 때문에 자괴감이라는 단어가 왠지 대중에 친근해진 느낌이 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자괴감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흔히 쓰이거나 자주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분명 아니었다. 자괴감이 느껴질 정도라는 말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옳은 길인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에 진배 없다. 당장 때려치우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다른 일을 찾는 것이 현명한 판단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의사 면허를 딴 지 십 년이 되어 간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그러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 건, 의사로서의 자존심이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는 자각. 환자를 위하는 길이 결국은 옳은 길이라는 신념. 이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면, 내 정체성이 붕괴되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진다.

어제 저녁, 중환자실에서 칼부림이 있었단다. 식칼을 꺼내 들고 위협만 한 건지 실제로 칼을 내저은 건지는 현장에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식칼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는 것은 미리 준비를 해 왔다는 말일진대,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봉변을 당한 것은 우리 2년차 전공의와 펠로우 선생. 입원 중인 환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고, 어쨌든 수술 후 합병증으로 재수술을 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환자의 보호자가 하필이면 담당 교수님께서 휴가를 가신 사이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담당 스탭이 없으면 나한테라도 연락을 할 것이지, 바보같이 순진하고 우직한 우리 전공의 펠로우 선생들이 그 난리통을 다 받아내고 알아서 수습을 했단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 펠로우 선생도 칼부림은 처음이었던지라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단다.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해서 현행범으로 체포를 했어야지 라고 말은 했지만 막상 칼을 보았다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는 나도 자신이 없다.

어쩐지 2년차 얼굴이 아침부터 좋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바로 말을 했었어야지. '으이구 이 병신아'가 입에서 튀어 나가려다가, 턴 바뀌고 첫 주에 일도 익숙하지 않아 가뜩이나 이래저래 혼나고 있던 차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얼굴을 보고는 쑥 들어가버렸다. 이 때가 바로 그 때다. 의사 생활에 회의감이 오는 그 때. '내가 이러려고'로 시작하는 자괴감이 불쑥 올라오는 그 때. 내일 아침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해도 모두가 수긍해 줄 것만 같은 바로 그 때. 턱 밑까지 올라온 '으이구 이 병신아'를 혼신의 힘을 다해 입 안으로 삼키고, '고생했네 너무 마음쓰지 말게나 허허허'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 그래, 잘했어. 아무렴.


문득 2년차 시절이 떠올랐다. 우여곡절의 1년차를 겪으면서도 진심으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나였다. 나는 병동 2년차였고, 말이 안 통하는 보호자가 눈앞에 있었다. 2주 전에 수술한 악성 림프종 환자였다. 천공으로 응급실로 내원하여 우반결장절제술을 했지만 워낙 복막염이 심했던 터라 사나흘을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회복되어 퇴원하게 된 할아버지였다. 2주만에 퇴원하게 된 것도 기적이라며, 이건 내가 사흘 밤낮을 중환자실을 지킨 덕이라고, 다 내 덕이라고, 괜히 혼자 우쭐해 하던 차였다. 항상 환자 곁을 지키던 아내 말고는 다른 보호자는 없는가 했더니 퇴원날이 되니 아들이 하나 나타났다. 뭐,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너무 고생하셨다는 공치사는 받지 않겠습니다. 의사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니까요. 혼자 속으로 막 이러는 중에, 하필이면 그 때,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림프종의 경우 면역화학염색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상대적으로 오래 걸리기도 한다. 림프종이라면 항암치료 전에 검사할 것도 많고, 하루 빨리 치료에 들어가야 한다. 마음이 급해졌다. 혈액내과 외래를 잡아서 보내려면, 지금 당장 컨설트를 해서 회신을 받아야 한다. 회신이 안 오면 혈액내과 외래를 예약해서 보낼 수가 없고, 그러면 치료가 그만큼 늦어질지도 모르니, 어쨌든 회신을 받아서 외래 예약을 해서 보내야겠다. 혼자 분주해 하고 있는데, 병동이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당장 퇴원하려는데, 대체 왜 기다리라는 거야!'

어지간히도 바쁜 보호자인가보다. 여지껏 한 번도 안 나타나다가 퇴원 당일에도 뭐가 그리 바빠 그 잠깐을 못 기다리고 병동에서 난리를 부린다. 쯧쯧 속으로 혀를 차며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이러이러해서 이러저러하게 됐으니 회신이 올 때까지만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퇴원시켜 드리겠습니다.

설명이 통할 보호자였으면 애초부터 이런 이유로 병동에서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겠지. 씨알이 안 먹힌다. 이게 병원이냐는 둥, 너는 뭐하는 인간이냐는 둥, 이래서 우리나라는 안 된다는 둥, 의사들이 돈 벌려고 눈이 멀었다는 둥, 온갖 아무 말이 난무한다. 외과 2년차가 되는 동안 크게 배운 것 한 가지는 참는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더 심한 일도 많이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그날따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2년간 누르고 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저 멀리 아득히 들린 듯도 했다.

사나흘 밤을 지새며 당신 아버지를 살린 건 바로 나다. 당신은 그 동안 어디서 뭐했냐. 한 번이라도 아버지 얼굴 들여다보기나 했냐. 당신 아버지 사경을 헤맬 때도 보호자 찾아서 설명할라치면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만 달랑 와서 그저 살려만 주십시오 하고 고개만 숙이던데, 그 때 당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냐. 면회시간에도 한 번도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그래도 보호자랍시고 퇴원날 되니 나타나서는 그거 못 참아서 이 난리냐. 내가 나 좋으려고 기다리라고 하느냐. 당신 아버지 치료 빨리 받으시라고 스케쥴 잡으려는 거 아니냐. 내가 당신 아버지 살려서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이 한 푼이라도 있는 줄 아느냐. 이게 어디서 행패야 행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의사와 보호자가 병동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구경거리도 이런 구경거리가 없다. 나는 떳떳해. 욕먹을 이유가 없어. 라는 건 말 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맨정신으로 감당할 도리가 없다.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이러려고 의사가 되었나.

...씨발.

나는 분명 속으로 말했는데, 그게 어떻게 보호자의 귀에까지 들렸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수간호사님이 나서서 나를 골방으로 밀어 넣지 않았더라면 그 날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나도 모르겠다. 말리는 간호사들 너머로 '뭐 씨발?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로 시작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육두문자가 날아와 꽂히는데 경상도 싸나이의 자존심이 있지 그 정도 욕은 나도 해 줄 수 있는데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지만 말리는 수간호사님의 간절한 얼굴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씩씩거리며 그대로 골방에 처박혀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만둬야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혼자 밤새 끙끙 앓았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불러내서 술을 진탕 마셨던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기억나는 건, 그 날 내가 느꼈던 자괴감이다.

내가 이러려고 의사가 되었나.

...씨발.


대한민국의 외과의로 살아간다는 건, 숱한 위기와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 그만두고 싶어지는 때가 온다. 그럴 때 정신을 온통 지배하고 놓아주지 않는 감정이, 바로 저 자괴감이다.

여전히 우거지상을 하고 있을 우리 2년차에게 내일 다시 얘기해 주어야겠다. 으이구 이 병신아...아 이거 아니고...너 잘 하고 있어 인마. 어깨 펴고. 당당하게. (그만두면 안된다.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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