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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Sep 25. 2020

제가 지은 죄가 많아서요

"저, 잘 깨어날 수 있을까요?"


수술을 받으러 들어온 환자들의 반응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잘 부탁드린다며 생글생글 웃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수술방 입구에서부터 눈물을 뚝뚝 흘리는 환자도 있고, 긴장해서 묻는 말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환자도 있다. 마취에서 잘 깨어날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환자들은 워낙 흔해서, 여태껏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환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 환자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료진의 말에 안심하고, 혹은 억지로 안도하는 척이라도 하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그날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의 반응은 좀 특별했다.


"제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요......"


생각지도 못한 환자의 말에 주변에 서 있던 의료진 모두가 웃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한없이 진지했다. 살며시 감은 환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깨어나지 못할 것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본인이 지은 죄로 인해 대장암이라는 벌을 받고 있다고, 죗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죗값... 죗값이라.

죄에 어떻게 값을 매길 수 있을까. 누군가 죄를 벌하고 사하는 절대자가 존재해서 네 죄는 천만 원, 네 죄는 일억 원, 너는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중한 죄를 저질렀으니 대장암이라는 벌을 내린다, 뭐 이런 식으로 정하는 것일까? 대장암이 죗값이라면 그 값을 제대로 치르려면 대장암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수술받고 대장암이 완치되어 버리면 나는 죗값을 치르지도 못하게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건가? 아니면, 대장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죗값을 충분히 치르고 있는 중인 걸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환자들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일종의 '형벌'같은 것으로 여긴다.


"저는 그동안 정말 착하게 살았는데 왜 제가 이런 병에 걸린 걸까요?"

이것은 대장암을 진단받고 외래에 처음 내원한 환자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 중의 하나다. 착하게 살면 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순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난데없이 암이라니 이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일일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느냐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란 참 궁하기 짝이 없다. 착하게 살아서 대장암을 막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그러면 멀쩡한 사람들한테 제발 대장내시경 좀 받으시라고 검진을 꼬박꼬박 받아야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고 침을 튀겨 가며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운동을 해야 하네 탄 음식은 먹으면 안 되네 어쩌네 잔소리할 이유도 없고, 대장암 걸린 사람들은 전부 뭔가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일 테니 색안경 끼고 바라보며 속으로 욕도 좀 하고,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병이란 것이 원래 사람 가려가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눈물을 연신 닦아내는 환자가 안쓰럽긴 하지만 나는 공감을 표시하기보다는 - 그랬다가는 초진 환자 한 명당 한 시간씩 시간을 잡아먹게 될지도 모른다! - 냉정한 조언을 하는 쪽을 늘 택한다.

"이유야 아무도 모르죠.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니까. 중요한 건 지금부터예요. 얼마나 마음 단단히 먹고 치료받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겁니다. 다행히 대장암은 수술하고 항암치료 잘 받으면 70퍼센트 이상은 완치되니까 마음 다잡고 치료 시작하자고요. 아시겠지요?"

그동안 착하게 살아왔는지 죄를 저지르고 살아왔는지는 치료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행여 정말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목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가 대장암을 진단받고 수술을 받으러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교수님, 이 환자는 무슨 죄로 수감되어 있대요?"

환자 주치의를 맡고 있는 1년차 전공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런 호기심을 대놓고 드러내는 너의 해맑음이란 정말 끝을 알 수가 없구나. 글쎄, 나도 사실 궁금하기는 한데 차마 환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고 교도관에게 물어봐야 안 가르쳐줄 것이 뻔하니 물어보지 않아서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해 주었다. 환자의 죄목은 어디까지나 환자의 프라이버시이고, 환자의 치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이 환자는 전과 10범인데 또 죄를 저질러서 수감되어 있는 중에 대장암에 걸렸으니, 호되게 죗값을 치르려면 수술도 얼렁뚱땅 하고 대충 퇴원시킵시다, 이럴 수는 없잖은가. 나는 그저 환자의 질병에 따라 최선의 치료를 할 뿐이다.

하지만 어떤 원칙이든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끔찍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사형수가 탈옥을 감행하다가 크게 다쳐 실려온다면, 이미 사형을 선고받은 환자를 '죽임을 당하게 하기 위해' 되살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의료윤리 시간에는 의사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하고 의사의 일은 치료이지 심판이 아니며 환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치료에 중요하지 않다고 배운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과연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 예외적이고 어려운 가치판단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당사자인 의사는 정말이지 괴롭기 짝이 없다. 의사도 어디까지나 사람일 뿐 신이 아닌데 신의 역할까지 요구받는 느낌이랄까? 


재소자라고 해도 어차피 똑같이 치료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사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게 할 수만은 없었다. 다른 환자들과 접촉을 피하기 위해 1인실에 격리하여 입원시켜야 했고, 수갑이 침대에 항상 채워져 있다 보니 병동을 걸어 다니며 운동하시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장 수술을 받으면 걸어 다니는 운동을 해야 회복이 빨라지는데 늘 침대에 묶여 있고 움직인다고 해봐야 겨우 화장실만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이다 보니 장마비가 오고 회복이 더뎠다.

환자 곁은 교도관들이 항상 지키고 있었는데, 한 명이 아니라 꼭 두세 명이 함께였다. 병원은 교도소처럼 닫혀 있는 공간이 아니다 보니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었지만, 목포에서 화순까지 교대를 해가며 환자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교도관들의 모습은 참 딱하기 짝이 없었다. 보호자 침대라고는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간이침대 하나뿐인데 세 명이서 낚시 의자 가져다 놓고 그 좁은 병실을 지키고 있으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교도관들은 내가 회진을 갈 때마다 퇴원은 언제 할 수 있는지를 물어왔고, 하루 이틀만 경과를 더 보자는 얘기가 내 입에서 나올 때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자는 자꾸 배가 아프다고 칭얼댔다. 혹여, 얼른 퇴원시키려는 내 마음을 알고 일부러 그랬던 것이었을까?

세 명의 교도관을 간병인으로 부리던 환자는 다행히 수술 후 일주일째 무사히 퇴원했다. 반년 후면 출소라고 했었는데, 지금쯤 출소하셨으려나. 죗값도 충분히 치르셨고, 대장암 수술도 잘 받으셨으니, 부디 앞으로는 죄짓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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