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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Apr 20. 2020

<슬기로운 의사생활>, 드라마와 현실 사이

자주 가는 미용실에서 지난 주말 머리를 잘랐다. 미용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연스럽게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이야기가 나왔다. 의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참 끊이지도 않고 나온다. <낭만닥터 김사부 2>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새로운 드라마다.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물어보세요."

단골이다 보니 미용사는 내가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외과의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수술 들어가기 전에 손 씻잖아요. 그러고 나서 손은 왜 눈 앞에 척 들고 들어가는 거예요?"

미용사의 질문에 대답 대신 파안대소를 해 버렸다. 며칠 전 아내도 한참 드라마에 빠져서 보다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그게 그렇게들 궁금한가 보다. 그런 호기심이 의학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지.

"그건요, 손을 팔꿈치보다 높게 유지하려는 거예요. 혹시라도 오염된 물이 손으로 흐르면 안 되니까 물이 손에서 팔꿈치 쪽으로 흐르도록 하는 거죠."

"아, 그런 거군요."

미용사는 그제서야 궁금증이 풀렸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한 설명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수술장에서 일하는 누구도, 적어도 내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손을 그렇게 쳐들고 들어가지 않는다. 손을 팔꿈치보다 높게만 유지하면 되기 때문에 가슴 높이 정도로 드는 것이 제일 자연스럽다. 양 손을 눈높이까지 들고 뻣뻣하게 들어오는 것은 이제 막 병원 실습을 시작한 의과대학 3학년 학생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의학 드라마하면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하얀거탑>부터 시작해서 <뉴하트>든 <브레인>이든 뭐든 우리 나라에서 만든 의학 드라마의 수술 장면은 하나같이 쓸데없이 비장하다. <하얀거탑>의 OST가 뚠뚠 뚜두둔 하고 흘려 퍼져야 할 것 같은 긴장감. 내가 이 환자를 구하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은 눈빛. 거기에 양념처럼 항상 더해지는 것이 바로 눈높이로 쳐든 양손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


수술은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물론 수술 중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긴장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온 몸의 긴장을 풀고 편안한 상태로 수술에 임하되 정신이 흩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운전과도 비슷하다. 운전대를 잡는다는 것은 매 순간 집중을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팔다리에 힘 빡 주고 운전 내내 긴장하는 것은 오늘 처음 운전대를 잡은 초보자나 하는 짓이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운전하는 내내 편안하다. 단지 돌발 상황이 왔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신경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외과 의사는 항상 긴장을 풀려고 노력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음악도 틀고, 시시콜콜한 잡담도 한다. 그것이 오히려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수술장에서는 내가 지휘자다. 내가 긴장을 하게 되면 내 리듬만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긴장이 수술장 모든 구성원에게 전해져 결국은 나쁜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수술 시작 전부터 내가 당신을 살리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를 품고 양손을 눈높이로 힘껏 들고 들어가는 행위는, 그래서, 틀렸다. 긴장은 풀라고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래도 세부 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다. 피묻은 거즈를 바닥에 늘어놓고 카운트하는 장면이라든가, 감수를 맡으신 의사 선생님께서 상당히 디테일한 것까지 챙겨 주신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그래도 손을 들고 들어오는 저 장면만은 제작진이 차마 포기할 수 없었나보다. 그게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이미 수술 시작 전 '스탠다드'로 굳어져 버렸을 테니까. 마치 어떤 클리셰처럼.


아, 현실과 다른 점은 또 있구나.

잘 생기고 유머 감각도 뛰어난데 노래까지 잘 하는 의과대학 수석 졸업생은 이제 더 이상 외과를 선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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