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꽃피는 춘삼월. 계절이 변하거나 말거나 누구는 연애를 하거나 말거나 콘크리트 건물 속에만 틀어박혀 청춘의 대부분을 소비하던 전공의 시절, 유일한 탈출구는 소위 ‘출격’이었다. 오늘, 출격이다. 치프 선생님의 이 한 마디에 놀이공원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마냥 마음이 들떠 오로지 하루 일과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었다. 허름한 실내포차의 소주 한 잔이 뭐가 그리 행복했던지. 출격은 모든 스트레스를 알코올과 함께 녹여 주는 기적이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약이었다.
그 날. 문제의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출격의 하루였다. 모든 것은 그 출격의 장소에서 시작되었다. 그 날 그 출격이 없었더라면. R을 데리고 가지 않았더라면. 아아, 내가 괜한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바이스 치프였다. 바이스 치프가 되었다는 말은 윗년차보다 아랫년차가 더 많아졌다는, 소위 중고참이라는 말이다. 왠지 어깨가 으쓱해진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기분이 더 좋아 부어라 마셔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는 얼큰해졌다. 게슴츠레 취한 눈에 비친 1년차들의 모습이 왜 그리 안쓰럽던지.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기특한 마음으로 시작한 건지 그냥 술자리 웃긴 이야기를 해 보려고 시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내가 1년차 때 했던 최고 짱돌짓 이야기 해 드릴까요?”
“네네, 해 주세요. 궁금해요.”
바이스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눈을 빛내며 듣고 있던 1년차 중에는, 그 이름도 찬란한 R도 있었다. 아아, R을 그 자리에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 이 이야기를 들려 주지 말았어야 했다.
“과장님 드레인 컷팅하는 건 다들 알고 계시죠?”
“네, 그럼요.”
“그럼 컷팅하다가 가끔씩 사고 나는 것도 알고 계세요?”
“네, 들어본 거 같아요. 혹시…?”
“네, 제가 1년차 때 저지른 일이에요.”
와하하하. 벌써 웃음이 터졌다. 뭐 어떤가. 웃으라고 시작한 이야기인데.
당시 과장님이셨던 K 교수님은 담도 췌장 전문이셨다. 특유의 카리스마때문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셨었는데, 얼굴을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호흡이 가빠지곤 했다. 행여 컨퍼런스 때 질문이라도 하나 하시면 아는 것도 대답 못하고 모르는 건 당연히 대답 못하니 버벅버벅 말만 더듬다가 결국엔 교수님의 한숨으로 끝나 버리는 게 당연지사였다. 교수님 수술 중에는 외과 수술 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수술 중 하나인 췌십이지장절제술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래저래 복잡한 중에도 특히 췌도와 공장을 연결하는 문합부위는 소화액이 지나다니는 길의 특성상 문합이 되지 않고 누출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것이 소화액인지라 누출이 발생하면 주변 조직을 녹여버리고 심하면 혈관까지 녹여 대량출혈이 발생하기도 하는, 아무튼 복잡하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수술이었다. K 교수님은 이 췌공장문합부위에 위치시킨 드레인은 꼭 컷팅하여 개방형 드레인으로 바꾼 후에 며칠에 걸쳐 조금씩 뽑게 하셨다. 이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어서, 드레인을 컷팅을 하려면 혹여나 발생할 지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옷핀을 드레인에 끼워 안전장치를 한 후 그 아래쪽을 자르도록 하고 있었다. 이것은 외과 전공의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제1수칙 중 하나였다.
1년차 여름, 첫 휴가를 앞둔 금요일이었다. 내일이면 휴가다. 드디어 자유다. 영어로 프리덤. 에프, 알, 이, 이, 디, 오, 엠. 프리덤. 나를 옥죄고 있던 모든 것들이여, 안녕. 병동 컴퓨터야, 너는 여전히 느리기 짝이 없구나. 오더 한 줄 넣을 때마다 약 올리듯 돌아가는 모래시계가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그러질 않네. 하지만 괜찮아. 내일이면 안녕이니까. 어이쿠 우리 신규 간호사님. 분당 맥박수를 790회로 기록하셨네요. 껄껄껄. 자판을 입력하다 보면 뭐 그럴 수도 있죠. 하필이면 나란히 옆에 붙어 있는 9랑 0이 문제지, 당신 잘못은 아니네요. 쥐 심장도 1분에 790번은 안 뛴답니다. 아무도 환자 심장이 1분에 790번이나 콩닥콩닥 뛰었다고 생각 안 할 거예요. 다만 차지 선생님께 혼날 뿐. 아, 나는 괜찮아요. 내일이면 안녕이니까. 아 세상은 아름답고 기쁨으로 충만하구나. 룰루랄라. 설레발 그만 치고 환자 드레인이나 자르고 오라는 2년차 형님의 호령까지도 천사의 속삭임으로 느껴지는 그런 하루였다. 그리고, 사고는 으레 그런 날 터지기 마련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잠깐의 방심이었다. 지난 몇 달간 드레인을 잘랐을 때 단 한 번도 당겨지는 느낌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절대 그런 일은 생길 리가 없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안전핀을 끼우지 않았고, 드레인을 잘랐고, 드레인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 환자 뱃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내가 드레인을 그냥 컷팅을 했단 말이에요. 미쳤지. 근데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요?”
“아니 글쎄, 온 세상이 갑자기 다 정지해 버리는 거야. 나랑 드레인만 빼고.”
“에에?”
“모든 것이 정지하고, 드레인만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더라구요. 1밀리미터씩.”
“와하하하.”
“그래서 생각했죠. 잘하면 잡을 수도 있겠다, 얼른 손을 뻗어 더는 못 들어가게 붙잡아야지.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드레인은 겨우 1밀리미터씩밖에 안 움직이고 있는데. 왠줄 알아요?”
“왜요?”
“내 손도 1밀리미터씩밖에 안 움직이더라구요.”
“와하하하하.”
“그렇게 멀어져가는 드레인을 보면서 그 찰나의 순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아 씨발 좆됐다, 했겠죠.”
“그건 당연한 거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아 씨 설마 휴가 잘리진 않겠지?”
“뭐라구요? 와하하하하하하.”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술자리였다. 선배가 저지른 꼴통 짓을 안주거리 삼아 마시는 술이 어찌 맛이 없으랴. 그 중 유난히도 R이 밝고 크게 웃었다. 그 땐 몰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대화는 이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어떻게 하긴요. 그 날 바로 응급수술로 배 다시 열어서 꺼냈죠.”
“으악.”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석고대죄의 마음으로, 그 수술 내가 들어갔었거든요. 정말 오금이 저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어. 지릴 뻔 했다니까.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고 덜덜 떨면서 죄송합니다 한 마디 드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시더라구요.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교수님과 눈이 딱 마주친 거야. 그 때의 K 교수님의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어우, 생각만 해도 몸서리.”
“으으……그런데 휴가는 어떻게 되셨어요?”
“그냥 그러고 끝이었어요. 치프 선생님께서 차라리 잘 되었다고, 환자랑 보호자 더 만나지 말고 썩 꺼져버리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쳤죠.”
“와하하하.”
“더 웃긴 건 뭔지 알아요? 그 난리를 치고 이듬해 결혼을 했는데 무슨 낯짝으로 K 교수님께 주례를 부탁드렸다는 거예요. 나도 참 대단한 거 같아.”
“예에? 아하하하.”
결론을 말할 때가 되었다. 웃고 떠드는 것도 좋지만, 이 이야기의 끝은 웃고 떠드는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잘 들어보세요. 의학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건 없어요. 여러분이 잠깐 방심한 사이, 실수와 사고는 그 방심의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명심하세요. 드레인은 꼭 안전핀부터. 알겠습니까?”
“네!”
R의 대답이 유난히 우렁찼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분명 그랬다.
다음 날. 심지어 며칠이 지난 것도 아닌 바로 다음 날이었다. 병동 2년차에게 전화가 왔다.
“형, 어떡하죠?”
순간 등골을 스치는 오싹한 느낌.
“드레인 들어갔니?”
“……네.”
불길한 예감은 어찌 이리도 빗나가는 적이 없을까. 씨발, 2년만에 또 좆됐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병동으로 올라갔다. 어찌된 영문인지 병동 2년차는 죽을상을 하고 있고, 옆에 있는 R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거리고 있다. 설마 2년차가?
“누가 그랬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여전히 벙글거리며 R이 대답했다. 나는 그 때의 R의 해맑은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게 얼마나 큰일을 저지른 건지 모르고 있는 건가. 기가 막혀 웃었더니, R도 따라 웃는다.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제 출격에서 안주거리로 떠들지 말았어야 했다. 1년차가 R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아아, 다 내 탓이다. 내가 바보같이 복선을 깔았다. 내가 죽일 놈이다.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 과거로부터 지혜를 얻고 잘못된 점은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임진왜란을 겪은 민족이 병자호란도 겪고 일제시대도 겪고 그러지 않았나. 어떤 병신 짓이든, 시간이 지나면 그 충격의 강도가 희석되고 한낱 추억거리가 되어 버린다. 내가 했던 최고의 병신 짓을 안주거리 삼아 웃고 떠들었던 그 날처럼. 그러다 보면 했던 병신 짓을 또 하고 또 한다. 대체 이런 짓을 왜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짓을 또 한다. 인간이란 무릇 그런 존재다. 의사라면 이런 익숙해짐과 무뎌짐에 저항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의사도 하찮은 인간일 뿐인지라 그것이 쉽지가 않다.
R은 잘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