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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Aug 22. 2020

저는 기피과를 전공한 의사입니다

내 전공은 외과다. 비뇨기과, 산부인과, 흉부외과와 함께 기피 순위 1, 2위를 다투는 과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외과를 지원했던 십수 년 전 당시에도 서울대병원 외과 전공의는 18명 모집에 겨우 9명 지원이었으니, 지방 대학병원들은 이미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전공의 지원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서울대병원인지라 결국 내가 지원한 해에는 2차 모집을 통해서 정원을 어떻게든 채우긴 했지만, 전국 단위로 보면 외과 지원은 여전히 매년 미달이다.


과를 정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의사가 전공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과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소위 메이저 과라고 불리는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정신건강의학과를 비롯해서 수많은 진료과들이 있고, 진단검사의학과나 병리과, 핵의학과처럼 직접 환자를 대할 일이 없어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과들도 있으며, 예방의학과나 산업의학과처럼 그 존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과들도 있다. 환자를 보느냐 보지 않느냐, 바이탈을 다루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과의 특성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어느 과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외과를 선택한 건 순전히 재미있어서였다. 학생 실습도 (비록 학점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외과가 가장 재미있었고, 인턴도 외과가 가장 재미있었다. 친구들이 내 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던 정형외과는 위계 질서가 강한 과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할 수가 없었고, 내가 학생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신경외과는 막상 인턴을 해 보니 수술이 잘 되어도 후유 장애가 크게 남는 과 환자들의 특성을 내 스스로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과를 정해야 할 무렵에는 마음에 드는 과가 외과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외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한 달에 한 번 겨우 퇴근할까 말까 했던 1년차 전공의 시절에도, 수술에 논문에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전임의 시절에도, 밤새 응급수술을 하고 수술장 탈의실 침대에서 겨우 눈만 붙인 뒤 다음 날 하루 종일 외래 진료를 보는 일이 허다한 요즈음도, 나는 내가 외과 의사여서 정말 행복했다. 바이탈을 다룬다는 것, 환자의 생사 여부를 내 두 손으로 결정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가슴 뿌듯할 수가 없었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그 뿌듯함에 중독되어 나는 대학병원을 떠나지 못했다. 비록 개원할 돈은 없었지만 페이닥터로만 취직해도 어디를 가든 대학에 남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금전적 대우를 받을 수 있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내는 의사가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병원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세상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 수술장에서, 항상 웃고 다니는 우리 1년차 A에게 물었다.

"너는 대체 왜 외과를 선택했니?"

A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외과가 제일 재미있더라고요. 이거 아니고는 안될 거 같아서요."

우리나라 의료가 이만큼 유지될 수 있는 건, 이런 열혈 낭만주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좋아서 외과를 선택한 낭만주의자 A도, 예외없이, 이제부터 파업에 들어간다.




나는 의학을 전공했지 의료관리학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서 우리나라 의료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부가 지금 추진하는 정책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정부는 공공의대를 설립해서 공공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를 양성하겠다고 한다. 남원이든 창원이든 포항이든 어디든 할 것 없이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서서 서로 공공의대를 유치하겠다고 아우성이다. 무슨 의과대학이 도깨비방망이 한 번 두드려 금나와라 뚝딱 하면 만들어지는 줄 아는가보다. 앞뒤 재지 않고 표팔이에만 여념이 없는 정치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니 오죽하겠는가.


의과대학 교육은 그 질을 담보하기가 매우 어렵다. 워낙 전공 분야가 세분화되어 있다 보니 의과대학 본과 4년의 기간동안 거쳐 가는 교수진의 숫자만 수백 명을 훌쩍 넘는다. 또한 적절한 규모의 실습병원이 필수적이다. 책으로만 공부해서 의사가 될 수는 없기에 학생 신분으로 임상을 경험하는 과정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모든 과 실습이 가능한 실습병원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과' 실습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대학병원급의 초대형 병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지방에 공공의대를 세우면, 이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교육 부실 문제로 서남의대가 폐교된 지 채 5년이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번 파업의 기폭제가 된 의과대학 정원 확대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본적으로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의료 취약지에도 의사가 필요하고, 기피과에도 의사가 필요하며, 기초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의사가 많아져야 우리나라의 의학 전체가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겠다는 발상은 너무 일차원적이라 기가 막힌다. 의사 수가 많아지다 보면 밀리고 밀려 결국 의료 취약지와 기피과에도 의사가 많아질 것이라는 유아적 사고가 정책 입안자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참담하다.


지방에 의사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막상 시골에 가면 어디에나 있는 것이 의원이다. 고혈압 당뇨로 약 타먹고 관절염으로 병원 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딜 가든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골 의원도 어느 정도는 유지가 가능하다. 하지만 외과가 어디 그런가. 흉부외과 산부인과가 어디 그런가 말이다. 개원을 하려면 환자가 있어야 하고 취직을 하려면 취직할 병원이 있어야 한다. 보험 수가는 원가도 채 보전해 주지 않는 마당에 전공을 살려 개원하면 쫄딱 망하기 십상이니 미용 성형쪽으로 개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전공을 살려 취직하려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병원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도시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정부는 시골에 개원해도 유지가 되도록 하는 유인책을 한 가지라도 제대로 제시한 적이 있는가? 지방의 부족한 의료 인프라를 보완하려는 대책을 함께 제시하였는가? 의사만 늘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병원이든 수술 장비든 검사 장비든 간호 인력이든 뭐 한 가지라도 있는 것이 없는데 의사 혼자 시골에서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십 년이 아니라 이십 년을 묶어둔 들,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모두가 기피하는 외과를 선택하고도 여지껏 한 번의 후회 없이 웃으면서 일할 수 있었던 건, 그저 환자를 살리는 것이 좋아서였다. 나와 마찬가지인 내 후배들이, 제자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밥그릇 싸움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너무 속상하다. 의사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전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것은 절대 의사 자신들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생업을 버리면서까지 코로나 최전선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었던 의사 집단이 왜 이번에는 국민들의 건강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파업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제발 조금은 고민해 보고 알아보려고 노력이라도 해 주었으면 한다.


당장 다음주부터 축소 운영될 수술장 때문에 스케쥴이 밀릴 환자들이 걱정이다. 여러 이유로 도저히 수술을 미룰 수 없는 환자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고, 파업이 길어지면 대책이 없다.


정부는, 제발, 이 파업을 멈추게 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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