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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Oct 15. 2020

총장골동맥의 추억

총장골동맥에서 선혈이 솟아오른다. 급한 대로 복강경 기구를 집어 들고 출혈 부위를 막아보려 하지만 무섭게 뿜어대는 동맥혈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급기야 카메라 화면이 피로 새빨갛게 물들고 시야마저 완전히 차단된다.

“오픈!!”

붉은 색을 본다고 흥분하는 건 투우장의 황소나 하는 짓인데. 아 그건 붉은색이 아니라 흔드는 깃발 때문에 흥분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어찌됐든. 흥분과 초조를 가라앉혀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피를 본다고 흥분해서는 안 되는데 훌륭한 외과의사가 되기에는 아직 수양이 부족한가 보다. 하복부에 정중절개(midline incision)를 가하자마자 이미 골반강을 가득 채운 출혈이 넘쳐 흐르기 시작한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내 앞에는 사색이 된 3년차가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다. 박리가 약간 어긋나고 있다고 느꼈을 때 좀 더 빨리 말했어야 했다. ‘거기로 가면 잘못하다간 총장골동맥(common iliac artery)을 다칠지도 모르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고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다. 내가 좀 더 살폈어야 했다. 집도의였던 당신이 아니라, 조수 자리에 서 있었던, 내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피를 볼 때마다 그 때가 떠오른다. 이미 십 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때는 2년차 겨울 무렵이었고, 나는 충수절제술이 손에 익으며 신이 나 있었다. 제2조수로 수술 기구만 죽어라 당기고 있을 때와 내가 집도의로 수술을 할 때의 기분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더 해보고 싶어서 당직 때면 어디 급성 충수염 환자 없나 내심 기다리곤 했다. 어느 정도 수술이 익숙해지고 난 이후에는 치프 선생님 없이 인턴 선생님과 학생을 데리고 수술을 하기도 했다. 혼자서도 수술을 마무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치프 선생님의 배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인턴 선생님과 둘이서 충수절제술을 하고 있었고, 충수가 후복막강으로 숨어 있었던지 그날따라 유난히 찾기가 어려워 헤매는 중이었다. 여기쯤이 충수돌기의 끄트머리인가 싶어 잘 보이지도 않는 수술 필드를 헤집고 전기소작기를 가져다 댔을 때였다. 여느 때와는 다른 출혈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어 이거 어떡하지 하는 동안에 피는 순식간에 차올라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머릿속이 새하얘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대고 있는데 마취과 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선생님, 혈압 떨어집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치프 선생님 좀 호출해 주세요. 빨리!!!”

마취과 선생님들이 환자 머리맡에서 분주하게 이것저것 하는 중에도 환자의 혈압은 쉬이 오르지 않았고 출혈은 전혀 줄어들 기세 없이 계속되었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외과 전공의 생활도 여기서 끝나는 건가. 지난 2년간 힘들지만 참 즐거웠는데. 여기서 끝내기는 억울한데. 안녕 내 청춘이여. 정신이 아득해지는 중에 멀리서 치프 선생님의 외침이 들려왔다.

“일단 눌러!!”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일 쉽고 확실한 지혈 방법은? 멎을 때까지 누르는 것. 시뻘건 수술 필드에 당황한 나는 그 단순한 사실마저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손을 집어넣어 더듬더듬 출혈 부위를 찾아 눌렀다. 여전히 출혈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아까와 같지는 않았다.

“괜찮아. 당황하지 말고. 석션(suction).”

치프 선생님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는 모든 잡념을 한 방에 날려주었다. 집중하자. 내가 사고를 쳤으니 수습도 내가 해야 한다. 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이에 치프 선생님의 빠른 손은 어느새 복벽에 추가 절개를 가하고 우측 총장골동맥의 출혈 부위를 찾아 내어 누르고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교수님을 호출해야 하나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치프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프롤린(prolene) 4-0 주세요.”

프롤린 실을 이용한 혈관 봉합이라니. 한 번도 직접 해 본 적 없는 술기다. 2년차가 언제 혈관 봉합을 해 볼 일이 있었겠는가. 저 높은 교수님들이나 하시는 줄 알았던 혈관 봉합을 치프 선생님이 직접 하신다니. 내 바로 윗년차일 뿐인데. 새삼 치프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치프 전공의는 저 정도는 혼자서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구나.

수술은 다행히 무사히 마무리되고 환자 상태는 안정적이었다. 뒤늦게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았다. 내가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다. 사고를 쳤고, 수습할 능력도 정신도 부족했고, 하마터면 환자를 잃을 뻔했다.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는데 치프 선생님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수영아, 나 이 악물고 했다.”

고개를 들어 치프 선생님을 바라봤다. 아직 켜져 있는 무영등이 마치 후광처럼 치프 선생님의 얼굴 뒤에서 빛났다. 형, 죄송해요. 전 아직 멀었나 봐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부끄러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앉아만 있었다. 돌아서 가는 치프 선생님의 등이 한없이 넓어 보였다.


출혈로 혈압까지 떨어지는 중에 상황을 수습하러 들어온 치프 선생님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제는 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그 속은 얼마나 타들어갔을지 이제는 안다. 긴장된 마음을 숨기고 사고 친 당사자를 안심시켰을 그 마음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습해야 한다. 내가 사고쳤을 때보다 더 잘 수습해야 한다. 아무 일이 없도록 수습해야 한다. 내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3년차를 위해서.

“괜찮으니까, 석션하세요.”

환자가 뚱뚱하여 시야가 잘 확보가 안 된다. 제기랄.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막지 못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나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킨다. 생각은 전이되기 마련이다. 내가 침착해야 내 앞에 서 있는 전공의가 침착할 수 있다. 후 짧은 한숨을 내뱉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간신히 출혈 부위를 찾아 누르고 나니 십 년 전 그 때 생각이 또 떠오른다. 그 놈의 총장골동맥. 그 때는 오른쪽, 이번에는 왼쪽. 이게 무슨 데자뷰인가 싶다. 업보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 때 치프 선생님이 했던 말을 낮게 내뱉는다.

“프롤린 4-0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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