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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Nov 22. 2021

신은 대체 어디에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L의 얼굴은 수척함 그 자체였다. 아니, 사실은 단순히 수척한 정도가 아니었다. L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이미 검사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L이 먼저 말을 꺼냈다.

"교수님, 요즘 너무 힘이 들어요. 하루 종일 피곤하고 쉬어도 회복이 안 됩니다. 제 몸이 왜 이런지를 모르겠어요."

나는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선뜻 말할 수가 없어 입을 꾹 다문 채 애꿎은 차트만 이리 넘겼다 저리 넘겼다 시간을 끌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L이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교수님. 말씀해 주세요. 뭐가 안 좋은가요?"

안 좋다. 더 이상 안 좋을 수 없을 만큼 안 좋다. 내 환자 중에 암이 이 정도로 빠르게 진행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L이 단연 일등이었다. 직장암 천공으로 응급수술을 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해서 항암치료까지 완료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고, 아프고 나서 느낀 바가 있어 요양보호사 자격을 따서 베풀면서 살려고 한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때가 불과 3개월 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몸속이 간, 폐, 복막, 골반, 뼈까지 재발한 암으로 가득했고 장폐색도 생겨 있었다. 어디가 안 좋다고 말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어디가 어디라고 특정할 수조차 없었다. 그냥 모든 곳이, 모든 것이 다 안 좋았다.

"제가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을 봤거든요. 다음 주면 발표가 날 건데 붙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입원해서 주사라도 좀 맞아야 할까요 교수님?"

L은 본인이 머지않아 요양보호사로 일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좀 피곤한 거라고,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나아질 거라고, 당신이 나를 낫게 해 줄 것 아니냐고,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식사는 좀 하세요?"

"아니오. 도통 입맛이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합니다."

그럴 거라는 걸 알면서 물어본 부질없는 질문과 예상했던 대답이 오가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더 이상은 피할 수가 없었다. 모질게 마음을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검사 결과가 안 좋아요. 그냥 안 좋은 게 아니고, 너무 안 좋아요. 암이 재발해서 몸 전체에 퍼졌어요. 재발한 암이 장을 막고 있고요. 여기 보이시죠. 여기가 간인데 간 전체가 전이된 암으로 뒤덮여 있어요. 피검사에서 간수치가 400이 넘었는데 정상치의 열 배가 넘어요. 간 전이가 심해져서 간이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한 거죠. 석 달 사이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진행해 버렸습니다."

L은 장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래서 그렇게 피곤했구나. 어쩐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너무 심하더라고요. 그러면 항암치료를 다시 해야 할까요?"

내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항암을 하려면 식사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장폐색이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지금 당장은 항암치료도 할 수가 없어요. 장폐색을 해결하려면 수술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간 기능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전신마취 자체가 위험해요. 무리해서 수술을 하고 천만다행으로 회복한다 하더라도 항암을 시작하려면 수술 이후에 한 달은 최소 쉬어야 하는데 지금 암이 자라는 속도로 봐서는 그 사이에 암이 더 진행해 버릴 거예요."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있는 L에게 나는 마지막 선고를 했다.

"얼마 안 남으셨어요. 길어야 두세 달, 올해를 넘기기 힘드실 수도 있습니다. 괜히 수술하고 고생하시느니 그냥 이대로 지내시는 편이 나아요. 호스피스 상담받으시도록 연계해 드릴게요."

L은 아직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요양보호사 자격 따려고 열심히 했거든요. 다음 주면 발표가 나요. 이제 저도 베풀면서 살려고요. 어쩐지 너무 피곤하더라니. 제가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아, 이거 참. 다음 주면 발표가 나는데. 이렇게 기운이 없어서야 원. 뭘 먹지도 못하겠고."

L의 독백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만일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하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하느님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둘은 똑같은 말로 들린다. 나는 계속 '전능하신 분'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십삼일 아침에 어디 계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알리바이는 매일 바뀐다."

- 토마스 린치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 중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보았다.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와는 별개로 공개된 첫날부터 반응이 뜨겁다. 하루 만에 전 세계 1위라니. <오징어게임>의 후광일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여하튼 대단하다. <지옥>은 공포가 유발하는 광신적인 믿음과 폭력, 그리고 우리를 심판하는 '신'에 대해 말한다. 그 '신'이 개신교에서 말하는 신과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지옥>은 이런 종교적 믿음이 얼마나 거짓될 수 있는지, 그러한 믿음이 집단적 광기로 이어질 때 우리의 세상이 어떻게 지옥이 될 수 있는지를 그려낸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보긴 했는데, '신'을 다루는 방식이 서양인의(특히 미국인의) 믿음과 충돌하는 부분이 보여 전 세계적인 흥행이 <오징어게임>만큼 지속되지는 못할 것 같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나는 원래 무신론자이기도 했지만, 병원에서 일하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 더욱 회의하게 되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앓다가 죽어가는 것일까. 이들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면 이들의 고통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있다면, 왜 누구는 고요한 죽음을 맞는 반면 누구는 거듭되는 수술과 항암 치료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일까. 시인이자 장의사인 토마스 린치는 그의 에세이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에서 신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며 '주먹을 휘두른다'라고 했다. 어찌 보면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이의 가장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지옥>에서 아무 죄 없는 신생아가 죽음의 계시를 받는다는 설정을 가져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연 '전능하신 분'은 존재하는 것일까? 


진료실 문을 나서는 L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전능하신 분이시여.

L이 잘 먹지도 못하면서 요양보호사 시험을 준비할 때, 당신은 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한낱 나약한 인간인 저는 대체 뭘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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