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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16. 2022

건강검진이 전부가 아닙니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이다. 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서는데 갑자기 계기판에 있는 모든 경고등이 켜지더니 차가 멈춰서 버렸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잽싸게 비상등을 켜고 시동을 다시 켜니 몇 번의 힘겨운 엔진 소리가 나더니 시동이 어렵게 걸리면서 엔진 경고등이 들어왔다. 내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뒤차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경적을 울려 댔고, 나는 어렵게 차를 빼서 빈 공간에 다시 주차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차장에서 그랬으니 망정이지 도로 한가운데에서 그랬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차량 정기 점검을 받고 바꾸라는 소모품을 싹 다 교체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 주행 중에 차가 멈춰 서다니. 11만 킬로미터 탄 차를 앞으로 최소 5년은 더 타겠다는 의지로 수십만 원을 들여 정비했는데 한 달만에 고장이 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제대로 따져야겠다고 마음먹고 여전히 엔진 경고등이 켜진 채 평소와 다른 괴상한 엔진 소리를 내고 있는 차를 끌고 혹시나 다시 멈춰 서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달래 가며 정비소로 향했다. 정비소로 가는 길은 한없이 멀기만 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죠?"

"엔진 경고등이 떠서요."

"한번 봅시다."

정비소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차량 진단 스캐너를 연결했다. 나는 목숨 걸고 겨우겨우 운전해 왔는데 너무나 차분한 정비소 아저씨의 대응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보세요, 내가 사고를 당할 뻔했다고요. 불과 한 달 전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여기서 정비를 했던 이 차가 갑자기 멈췄다고요!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고, 나는 대뜸 화부터 내는 진상 고객은 아니라는 자기 최면을 걸면서, 조용히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요, 여기서 정기 점검받은 지 한 달밖에 안 되었거든요. 소모품도 싹 갈고요. 근데 이렇게 바로 고장이 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나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하며 속으로 씨익 웃었다. 어떻게 하면 품위 있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아저씨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지요."

"...... 네?"

그게 왜 당연하냐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나를 보며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건강검진 받으시죠?"

이것 보세요. 물론 모르시겠지만 제가 바로 의사입니다.

"네, 받죠."

"사람이 건강검진 받았다고 안 아파요?"

어라. 이건 내가 내 환자들한테 하는 말인데.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정기 검진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부분들 점검하고 시기에 맞춰 소모품 교체하고 그게 전부예요. 차량 고장의 원인은 수백수천 가지인데 그걸 전부 예상하고 막을 수는 없어요. 십만 키로 넘게 타셨으니 이제 한 군데씩 잔고장이 날 거예요. 그때그때 고쳐가면서 타는 거죠."

아저씨의 말이 백번 옳은 것 같아 나는 한 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다. 정비소 아저씨는 엔진에서 무슨 센서를 하나 교체했고, 이후로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타고 다니고 있다.




대장암 환자들이 외래에 처음 내원하면 나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본다. 대체 암이 왜 생긴 건지, 나는 몇 기나 되는지, 수술받으면 괜찮은 건지, 완치는 가능한지 등등 비슷비슷한 질문이 쏟아지는 가운데, 몇몇 억울한 환자들은 불만을 토하기도 한다.

"교수님, 저는 올해 건강 검진에서 이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대장암이라니, 말이나 됩니까?"

어떤 문제인지 뻔히 짐작이 가기에 나는 미소를 띠고 물어본다.

"어떤 검진 받으셨는데요?"

"어떤 검진이라뇨. 검사하라고 통지서 날아오잖아요. 그거 받았죠."

역시나 그랬다. 환자는 국가암검진을 받았고 대장암검진에서는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암을 진단받고 온 것이다. 환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2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검진을 받았고 이상이 없다고 국가가 공인을 해 주었는데 그게 아니라니, 암을 찾아내지도 못할 거면 대체 국가암검진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이유는 무엇이며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네, 아닙니다. 국가는 여러분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번에는요.


국가암검진은 암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검진 사업이다. 흔히 5대암이라고 하는 위암 대장암 간암 유방암 자궁경부암에 대하여 검진을 시행해 왔고, 최근에는 폐암 검진이 추가가 되었다. 각 검진마다 검사 방법과 간격이 다른데 대장암의 경우 매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분변잠혈검사(fecal occult blood test)를 시행한다. 분변잠혈검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량의 피가 대변에 섞여 있지 않은지를 검사해서 대장암을 스크리닝하는 방법이며, 분변잠혈검사에서 양성(positive)으로 나온 경우 대장내시경 검사를 추가로 권하게 된다.

문제는 분변잠혈검사의 예측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데 있다. 분변잠혈검사에서 양성(positive)이라고 하더라도 대장암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대장암이 아닌 다른 이유로 소량의 혈액이 섞여 들어갔을 수도 있고, 혈액이 아닌 다른 성분에 반응해서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기도 한다. 반대로, 분변잠혈검사에서 음성(negative)이라고 하더라도 대장암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음성이어도 대장암이 발견될 확률이 30-40% 이상까지도 보고가 되고 있어서 분변잠혈검사 결과만 믿고 나는 대장암이 아니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대장암 검진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장내시경 검사다.


그렇다면 왜 국가암검진 사업은 대장내시경이 아닌 분변잠혈검사를 시행하고 있는 것일까?


대장내시경 검사는 상당히 침습적(invasive)인 검사다. 쉽게 말해서 꽤 위험할 수 있는 검사라는 말이다. 시술 중 출혈이나 천공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일단 천공이 발생하면 응급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 된다. 또한 대장내시경 검사는 장정결(bowel preparation)이라고 하는, 검사를 위해서 장을 깨끗하게 비우는 지난한 준비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물론 대장내시경 검사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면 대장암은 더 많이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검사에 따르는 합병증 우려와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 등이 대장암의 조기 발견으로 인한 이득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더 크다. 그렇기 때문에 대장내시경 검사는 일반적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검진 방법으로는 권장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대장내시경 검사 대신에 싸고 간편한 분변잠혈검사를 통해 스크리닝을 하고, 이상이 있는 환자에 대해서만 대장내시경 검사를 권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국가암검진 사업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의사들은 5년에 한 번 정도는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아 보기를 권한다. 대장내시경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검진사업으로 시행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대장암 조기 검진을 꼭 원하는 사람이라면 분변잠혈검사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장정결의 불편함과 검사의 위험성을 감수하고라도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아 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꼭 명심하시기를 바란다. 적어도 5년에 한 번은 대장내시경을 받으시라.




검진은 어디까지나 검진이다. 검진을 받았다고 해서 다 괜찮은 것은 아니다. 항상 관리해야 하고, 이상이 없는지 늘 살펴야 한다. 그것이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


차든, 사람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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