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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Feb 15. 2023

외과의사의 어느 알찬 하루

등에 표피낭종이 생겼다. 며칠 전부터 견갑골 상방에 뭐가 만져져서 뾰루지가 났나 보다 하고 그냥 있었는데 자꾸 커지고 아프길래 아내에게 봐 달라고 했더니 뭔가 까만 점 같은 것이 가운데에 있는데 좀 이상하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보이는 위치도 아니지만 안 봐도 뻔하다. 

"Epidermal cyst네."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니 아내는 더 궁금한 눈치다.

"그게 대체 뭔데?"

"Epidermal cyst라고 있어. 별 거 아닌 거."

"그러니까 그게 우리말로 뭐냐고."

"음... 그게... 에피더말 시스트라니까. 하여튼 그런 거 있어. 무슨 낭종."

치매도 아닌데 표피낭종이라는 말이 생각이 안 나서 버벅거리는 남편을 이 양반이 정말 외과 의사가 맞기는 한 건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던 아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는데? 짜야 돼?"

어지간하면 가라앉기를 기다려 보겠는데 이미 며칠이 지나서 벌겋게 부어올랐다. 게다가 사흘 뒤에 제주도로 놀러 갈 예정이라 그전에 해결을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제거해야 할 것 같다.

"아니, 수술해야 돼."

별생각 없는 나와 달리 아내는 놀란 토끼눈이다. 이미 치프 전공의 때 질리도록 했던 수술이고 국소마취로 간단하게 끝나는 별 거 아닌 수술이라는 설명 없이 그냥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나저나 이를 어쩌나, 나는 내일 하루 종일 외래 진료가 있어서 수술받을 시간이 없...기는 무슨. 어쩌긴 뭘 어째.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니 걱정 없다. 그냥 적당한 때를 봐서 수술받으면 된다.


다음 날 오전 외래가 끝나고 점심을 먹은 후 박교수를 호출했다. 수술은 이미 어레인지가 되어 있고, 오후 외래 시작 시간까지 30분이 남았다. 여느 국소마취 수술 때처럼 수술복을 입고 13번 방으로 내 발로 걸어 들어간 것까지는 똑같았는데, 갑자기 상의를 벗고 수술대 위에 엎드리려니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환자분 어서 안 엎드리고 뭐 하세요."

박교수가 실실 쪼개며 수술대를 가리킨다. 아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몸을 맡긴 입장인데요.

대충 짜고 파내랬더니 그러다가 재발하면 누구 책임이냐며 낭종벽을 1mm씩 세심하게 박리하시는 박교수님 덕에 수술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박교수는 낭종벽을 터뜨리지 않고 온전히 떼어낸 혹을 자랑스러워했지만 덕분에 나는 불편하게 오래 엎드려 있느라 목덜미에 담이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꼼꼼 박교수님. 재발은 안 하겠네요.

오후 외래 시작 시간이 15분이 지났다. 수술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가운만 걸친 채 다시 외래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오전 외래 진료를 하고, 수술을 받은 후 (수술을 한 후가 아니다), 오후 외래 진료를 하고, 회진을 하고, 응급 수술까지 끝낸 후에야 퇴근할 수 있었다. 


내가 종합병원 외과의사가 아니었다면 오늘 하루 휴가, 아니면 적어도 반차를 내야 했을 텐데. 혼자 진단하고 수술방 어레인지해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수술을 받으니 일할 거 다 하고 쉽게 수술받았다.

아싸 개꿀!

......은 개뿔. 쉬었어야 맞는 거다. 아무리 별 거 아닌 수술이라고 하더라도 쉬는 것이 당연한 권리인데,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오늘 근무 다 해가면서 수술받고 왔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러고 사는 것인지. 

응급수술 시작 전 잠시 병원 앞 약국에 들러 항생제와 드레싱 재료들을 사 들고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는 길이 전에 없이 처량했던 것은 아마도 쌀쌀했던 날씨 탓이었지 싶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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