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검색중에 입시커뮤니티를 보다가 뜨끔,한 게 있다.학부모가, 아이가 학원을 다니는데도 중하위권이라며, "이쯤되면 공부를 아예 안한거라고 봐야지요?" 하는데 댓글에 '그런 말 쉽게 하지 말라, 아이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댓글이 있었다. 누가 봐도 학원에 소위 전기세 내주러 다니는 거 아닌가 했는데,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댓글이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늦되었던 첫째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영원히 안 탈줄 알았던 자전거를 처음 가르쳐주는데 몇 번 가르쳐줘도 못해서 막 화를 낸 적이 있다. 난 자전거를 잘 타니까. 내가 처음에 어떻게 배우고 넘어졌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가르치는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었다.
아이는 자전거를 잘 탄다, 지금.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는 것은, 과연 거창한 말이 아니라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못타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다.누구나 최선이다.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지금 나는 그 선택의 결과이다.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 했다. 안했다고? 아니 그건 처음부터 나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지 최선을 다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나 또한 늘 매일 저녁 혼자 샤워를 할 때엔 지난 일들을 곱씹으며 그 때 왠지 더 잘했어야 할 것 같은 죄책감,그러지 말았어야한다는 후회, 그렇게 했어야만 한다는 자책감에 몸서리쳐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실 그게 내게 최선이었다.내가 걸어온 모든 길이 최선이었다. 최악은 무리했을 때 일어난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과, 그 당시의 나 자신, 자원, 한 줌의 우연과 2퍼센트 아니 20퍼센트의 필연적인 비합리성, 우주의 기운, 딱 그때만큼의 상상력과 계획성 등으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해왔던 것이다. 최선이 아닌 것을 한 적은 없다.
후회나 죄책감은 인테리어 잡지의 인테리어와 그냥 실제 우리집간의 괴리, 내가 설정한 최선과 실제 내 역량의 최선의 차이이다. 실제 내 역량의 최선은 잊어버리고 오버스럽게 목표를 설정해놓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었다고, 이랬어야했는데 저랬어야했다고 자책하는 것이다. 노오력했으면 됐을 거라고? 화성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누구나 화성에 가지 않고, 갈 수도 없듯 나도 나의 지구안에서 최선을 다했다. 갈 수 있으면 진작 간 것처럼.
그러니까 사실 나도,그 때도, 지금도. 저 아이도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말마따나 존재하는 것은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며 받아들여져야 할 것들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최선이란 무리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이 사실은 최선이다. 지금까지 나 자신 그 자체가 최선인 것이다.
중간고사가 지나갈 때 나는 아이 입학과 함께 가입했던 입시카페를 탈퇴하고,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가 뒷목잡을 이유 없이 지나갔다. 그냥 있기로 했다. 예를 들면 아이는 지금 자전거를 배우고 있을 뿐이라고.아이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