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의 워킹맘 시절을 접고 다른 시대를 열었으니, 바로 전업주부의 시대였다. 이제 한 달의 KPI대신, 1년의 액션플랜과 중장기전략 대신 일상이 내가 수립해야할 목표가 되었다.
2018년 10월 전업주부의 가사노동의 가치가 연간 2,315만원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정부가 밝혔다고 굳이 떠들어대지 않더라도, (통계청, 2014년 기준) 주부는 엄연한 직업이다. 나만 하더라도 직장 다닐 때 가사도우미를 써본 적이 있으니, 말할 것도 없이 가사는 프로의식을 가지고 한다면 현금화가 가능한 노동영역이다.
그러나 세상 어떤 직업이 그렇듯 업무분장이라는 것이 있고 직업의식이 있어야 하고, 책임과 권리가 있고, 충분한 낭만도 있고 퇴직욕구도 있다. 인크레더블2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미스터인크레더블인 밥이 말한, ‘주부의 역할은 영웅적인 것이다. 제대로만 한다면.’
아이 친구 엄마와 얘기하다가 그 엄마가 “글쎄 우리 아이가 엄마 직업을 ‘전업주부’라고 적어놓은 거예요” 라며 부끄러움일지 쑥스러움일지 모를 감정을 내비칠 때 나는, 주부는 당연히 당당히 쓸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시간을 들여야하고, 물리적,정신적 힘을 이용해야하고, ‘대체 가능’하다는 그 점이 오히려 ‘노동’이라는 점을 인정해준다.
가사노동의 가치와 업무분장의 문제와는 별개로, 집에서 아무런 시간과 제약과 제한이 없어 무한정 자기만의 시간을 주도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 전업주부를 처음 해보는 나에게 말못할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권태였다. 제약이 없음으로서 얻어지는 한없어 보이는 자유는, 다른 이름으로 권태였다. 나의 시간의 주인이 되는 달콤함에 대한 대가는 무기력 혹은 권태였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절대로 순수하게 발현되지 않고 거의 의무와 강제성에 주로 의한 상대적인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마치 성악설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웠다.
물론 그렇다고 이 선택을 후회할 만큼 이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사는 곳을 송두리째 바꾼다고 해서 ‘내’가 바뀌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권태와 맞바꿀 진실인 것이다. 이제 뻔해진 이 일상이, 나이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혀 크리스마스 기분도 송년 기분도 나지 않고 그 좋던 책도 책에 관한 것들도 여행조차도 시들한 지금은, 그 시들해하는 것이, 한껏 시들해하면서 견디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일인 것이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널고, 개고, 간식을 챙겨주고, 저녁을 만들고, 잔소리를 하고, 불을 꺼주고. 매일 매일 특별할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는 이 진짜 일상을, 시들해하면서도, 지긋해하면서도 지키고 견뎌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빨래와 청소를 무심하게 하는 것을 마치 목표처럼 추구해야한다는 것을, 아픈 몸을 일으켜 매일 쳐들어오는 적과 같은 빨래를 개고 넣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제부터 이 시시함을, 어떤 극적인 사건도 재미도 없을 타지에서의 일상을, "아,모두 시시해.뭐 재미있는 일 없나"라는 말은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견디는 것이 유일한 나의 목적인 것처럼 무사하게 견뎌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일부러 걷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그저 걷고, 걷고, 시작과 끝만이 존재함을 알수 있는 건 나에게 주어진 하루뿐이다. 그리고 이 권태를 견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행복은 불행이 없는 상태" 라고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언급된 것처럼, 눈도 비도 오지 않는다해도, 불행없는 이 행복을 즐겨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