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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Oct 30. 2022

머무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몇번의 가을이 왔고, 화분에 씨앗을 뿌렸었다. 7-9월에 파종하는 꽃이라 했다. 그러나 꽃씨는 싹을 전혀 틔우지 않았다. 대신 새들이나 혹시 와서 먹으라고 화분주위에 뿌려놓은 차조가 굴러들어갔는지 삐죽하고 가느다란 볏잎같은 잎이 돋아났었다.     

나는 종종 이 도시가 권태로웠고, 미웠다. 통창 가득히 보이는 산과 나무는 이 아파트가 아주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가득히 숨막힐 듯한 햇살은 이 집이 내 고향 서울보다 멀리 멀리 떨어진 남쪽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언젠가는 일주일내내 집안에만 있었던 적도 많았다. 인간이란 늘 자신이 자고 일어나는 그 곳만을 미워하다가 사랑하게 되는 것이 습관인가보다.  

그러다 어쩌다 영화를 보러나가고, 버스를 타고, 갈아타고, 걷다보니 조금씩 이 도시가 눈에 익어갔다. 구청에서 해주는 무료 영어회화를 신청하기도 하고, 집주변의 저수지 주변을 내심 매일 힘껏 걷기도 했다. 수레국화도, 양귀비도 사라진 가을 저수지둘레길에는 한참 뚱딴지꽃이 피더니, 이젠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억새들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였다. 억새는 정말로 줄기가 억세서 아침 산책의 전리품으로 쉽게 가져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어쩌다 길가에 떨어져있는 억새만을 몇 개 가져가서 집안 바구니에 꽂아두었다. 바싹 말라서, 어떠한 생생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성가시지 않는 억새에서 ‘늙음’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나팔꽃이 피고 지는 동안에도 많은 꽃들이 자기들만의 시간표대로 성실히도 피고 지고 씨를 뿌려 부려놓았다. 나는 신이 마음껏 씨를 뿌려놓은, 신이 만든 정원을 발견한 것처럼 매일 갔다.

한번은 어떤 노부부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노랗고 작은 송이의 국화꽃들을 가득 꺾어서는 서둘러 꽃봉오리만을 따서 넣고 계셨는데, 꼭 어린 날 그렇게 모여 앉아 하던 소꿉놀이가 떠올랐다.  우리의 매일은 옆에서 보면 유년의 모습처럼 소꿉놀이를 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일까.  

 한껏 비밀스럽게 쓸어담는 모습을 보자니 저 꽃이 뭐라고, 분명 약초일래나?했었는데 장에 가서 그 국화의 정체를 알았다. 장 한켠에 '금국'이라는 바싹 마른 국화꽃송이들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씻어 데쳐서 바싹 말려서 국화차로 마시는 것이다. 운동길 지척에 피어있지만, 잠재적 현금덩이들이 그렇게 흐드러져있지만, "그걸 언제 말리냐.." 하며 매 운동길마다 그냥 몇 송이만 꺾어서 물병에 꽂아 놓았던 것이다. 모험이 어쩌고 하지만 지척의 꽃 꺽어 말리기도 귀찮아서 티백 홍차를 마시는 사람이 나인데.      

행복이 늘 찾아 떠나는 대상이 되면, 행복은 여기 없는 것이 된다고 법륜스님이 말하셨던가. 언제나 모험 타령을 하지만, 떠나는 것보다 사실은 계속 머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머물러라. 더 많이, 더 깊이, 더 오래. 머뭄이 축복이 되기를,

그래서 권태가 짓물러 고름이 되고 또다른 깨달음의 새 살이 나올때까지 우리는 수행하는 셈으로 머물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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