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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Nov 17. 2019

유년을 다시 산다는 건

밀양


 

밀양은 왠지 비밀스런 곳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고 가 볼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머나먼 남쪽의 도시. 역시 밀양은 실제 한자(陽)처럼 햇살이 창궐하는 마을이다. 넓디 넓은 강이 평야처럼 펼쳐지고, 거기에 햇살이 마구 부려진다.

두번째로 방문한 밀양 구천계곡 캠핑장은 일명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산중 골짜기에 있는데, 영남 알프스란 운문산, 재약산 등 영남 지역의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7개 펼쳐져 붙은 별명이란다. 알프스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과연 첩첩이 쌓인 높은 봉우리와 능선이 양쪽으로 솟아나듯 에워싼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고 있으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 부부의 계획은 계곡 코 앞에 텐트를 치고 아이들을 계곡으로 밀어넣고 하릴없이 바라보며모히또나 마시며계곡을 마치 풀빌라인 듯 이용하는 것이었는데, 비가 부슬거린다. 그러나 남편은 기대하던 '우중캠핑' 이라며 들떠했다.

비는 계곡수영도, 우중캠핑도 어느 것도 시원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하고 부슬부슬 후둑후둑 오다말다 했지만 캠핑장에서의 시간은 정말로 느리게, 너무도 느리게, 그러나 꼭 필요한 것들로 채워지며 흘러가고 아이들은 그 깊지도 않은 작은 개울물에 보트를 띄워 엎드려 시간도 같이 띄운 듯 온 몸을 던져 시간을 흘려보냈다.

캠핑을 오면 밥을 하러 쌀을 씻으러 가는 것도, 설겆이할 그릇을 정리하는 것도, 세수를 위해 세면도구를 챙기는 일도 캠핑장에서는 하나의 일의 단위가 된다. 마치 일상을 나노 단위로 쪼개서 분석하고 관찰하는 느낌이 들어서 낯설고 새롭다.

이 캠핑장에서 특히 좋았던 점은, 설겆이하는 개수대에 늘 라디오가 틀어져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무려 야외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추억의 팝송까지 들으며 설겆이를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라디오에서 정말 오랫만에 내가 중학교때 열광했던 외국 아이돌 가수의 노래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사실 전혀 그래야 될 타이밍이 아닌 것 같은 때. 옛날엔 주로 어둠속에서 이어폰으로 들었던 노래를 그 찬란한 햇빛 속에서, 설겆이를 하며, 다시 들으며 강제로 2개의 세계에 동시에 놓여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는 자꾸 지나온 날들을 더욱 명징한 시간 감각으로 다시금 바라보게 되는 나는. 이제는 현재의 렌즈에 내 아이의 안경을 끼고 다중초점으로 과거를 바라보게 된다.

그랬다. 내 아이를 통해 나의 유년과, 부모님의 청춘을 반영처럼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 소위 유년을 다시 산다는 것이 처음에는 마냥 행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게다가 어쩌면  특히 나의 유년을 그대로 대입해보는 것이 감히 가능하다고 귀엽게 착각하게 되는 나와 샅은 성별인 '딸'을 키운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콤씁쓸한 벌. 기억과 망각은 같은 의미로서 축복인 것이다.유년을 다시 산다는 것은.

어쨌거나 평일내내 태양 작렬하다가 계곡으로 떠난 주말에 하루종일 비가 온다거나, 싸다고 산 복숭아가 너무 맛이 없다거나, 아이의 수학 성적이 너무 형편없다거나,잘 되가는 일이 별로 없다고 느껴지고 자기혐오에 빠지고 삶이 나를 속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린 아이의 살을 부비고 그 비릿한 살냄새를 맡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아니 완벽하다고 나도 나를 속여야하는 그런 여름날이었다.

화려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너희들의 그 작은 계곡이, 그것이 절대 세상의 전부가 아닐지라도, 그저 엄마란 사람이 만들어놓은 작은 파라다이스일지라도. 축복과 벌이 공존하는 순간이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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