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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Nov 17. 2019

너에게 소중한 것이 나에겐 하찮음, 그건 참 슬픈 일

울진

 "엄마, 고기 먹고 싶어요" 라는 말만큼 무서운 것이 있다면"엄마, 게 먹고 싶어요" 라는 말일까.

어찌됐건 근 두 달의 방학기간동안 두 아이들과 붙어있던 나는, 어디로건 가야하겠다는 결의에 차있었다.

우리 가족은, 아니 나는,대구로 이사를 결정한 이후에는 서울에서는 엄두가 안났던 경주, 양산, 영덕, 울진 등으로 여행 다닐 생각에 들떠했다.

다음 해돋이는 어쩌면 우리나라 제 1의 해돋이 명소인 간절곶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들떴고 나는 경주, 하동, 진해-내 나라임에도 미지의 세계인 그곳으로, 항공권을 끊고 게이트를 나서듯 시동을 걸어 고속도로를 나서는 상상을 했다.

그리하여 대게가 제철,아이들과 남편의 유난한 갑각류 사랑을 추동력 삼아,그리고 새 학년과 새 유치원, 남편의 어떤 새로운 시작을 겸사겸사 기념하며 삼일절 전날 휴가를 내고 이사 이후 이른바 ‘대한민국 탐험여행’의 첫 여행으로 울진을 택했다. 물론 여행 내내 새 학년, 새 학기에 관한 얘기는 한 마디도 나눈 것 같지 않지만.
 

울진, 하면 전형적으로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는 그런, 의례 방문해야하는유명 명소라는 것이 싫었다. 구태의연하고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울진은 어차피 나에게는 아프리카만큼은 못해도 대만만큼은 생경한 곳이다. 어느 날 문득 무심히 방바닥을 닦다가, 바로 그 전형적인 곳들을 모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래,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당연히 가듯, 프랑스의 몽마르뜨 언덕을 당연히 찾아가듯, 울진의 성류굴과 백암온천을 당연히 안 가볼 이유는 또 뭔가. 나는 뻔한 곳을 가고 싶어졌다.

유명 명소인 바로 그 백암온천쪽으로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온천매니아인 딸과는 달리 온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이번 여행을 계기로 온천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대구에서 울진은 3시간 정도 걸린다. 도중에 영덕 강구항에서 점심으로 물회를 먹었는데 주말이라 차로 북새통이었다. 주말에는 강구항에 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바다와 가까운 이 곳에 이사온 이후에 물회 마니아가 된 남편 때문에 물회를 자주 먹게 되는데 물회는 우리끼리 사천이랑 포항 구룡포, 속초 봉포머구리횟집을 3대로 친다.

유황온천이 그렇게 좋은지는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나라에서 3곳뿐이라는 유황온천이다.

오누이는 어디를 가도, "이 호텔 되게 좋다!" 며 환호성을 지르고, 알콩달콩 레고를 가지고 사이가 좋다. 첫째 입장에서는, 어디에서건 청소와 밥에서 해방되면 좋은 나처럼, 어디에서건 그곳이 레고를 가지고 놀 수 있다면 좋은가보다.그리고 대게로는 대동단결이다.

대게빵이라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사실 약간 코웃음을 쳤는데, 첫날부터 오며가며 우리의 시장기를 채워준 고마운 빵이다. 한 개 1,500원인 울진 대게빵은 대게처럼 크고(커서 대게가 아니라 다리가 대같아서 대게라지만) 가운에 몸통에는 팥, 양 다리쪽에는 호두나 블루베리가 들어있는데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지만 대게빵에는 대게가루가 포함되어 있어 약간 짭짤한 호두과자맛이다. 뻔한 곳에 가서 뻔해보이는 걸 먹지만 뻔하지 않은 것, 결국 사는게 다 그런가보다. 특별함을 위해 몸부림칠 것도 없이, 도착한 날 저녁, 온천을 하고 잠이 든다.

둘째날엔 시린 겨울날 문명의 이기따위는 나뭇잎만큼도 없는 과거 속으로 걸어가는 듯이 회색빛 나뭇가지 아래를 걸어 신라시대부터 있어 와서 임진왜란때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숨어살기도 했다는 오래된 성류굴로 간다. 

울진 지역은 예전에 신라 지역이었고, 교통이 아직도 별로 좋지 않아선지 조선, 고려시대가 아니라 신라 화랑이 나오는 오래된 유적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에서 잠시 비껴나있는, 시간도 쉬어가는 느낌이었다.  

제 오빠가 박쥐나 곰이 나온다고겁을 주자동굴이 무섭다던 불쌍한 둘째아이는, 곰은 절대 없다고 안심시킨 후에야 동굴 탐험이 재미있다고 지치지도 않고 걷는다.

제 오빠가 종류석,석순,석주 이름을 읽으며 한 석주의 이름이 '로마의 궁전' 이라고, 푯말을 읽어주니까 그런다."로마는 누굴까?"

그 다음으로는 남편이 지역 주민에게 추천받았다면서 죽변항에 위치한 '폭풍속으로' 드라마 촬영지에 도착했다. 언덕 위에서 보면 해안이 하트 모양이어서 별명이 하트 해변이다.

하트도 하트지만 크고 작은 바위들에 던지듯 부서지는 파도를 보는 묘미가 있는, 시원해지는 바다였다. 같은 동해라도 속초,고성의 바다와 영덕, 울진의 바다가 또 그렇게 달랐다.

어디에서건 스스로 놀거리를 찾아서 노는 아이들은 여기서는 돌멩이들을 탑으로 쌓고, 주머니에 한 가득 주워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사진을 찍다가 이제가자고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무어든 주워가지는 프로주울러(?) 둘째가예쁘다며 바닷가에 있던 유리조각까지 한가득 주머니에 담았길래 위험하다고 버리라고 했더니 그게 뭐라고 앙앙 운다. 파도에 다듬어져 연한 녹색빛으로 둥글러져는 있지만 한낱 음료수 병 깨진 조각들일 그것들. 간혹 제 손에 긁혀 피까지 나길래 더 속상해서 혼냈더니 그 와중에도 괜찮다고, 괜찮다고유리조각을 버리지 말란다.

너에게 그렇게 소중한 것이 나에게 하찮아서 슬프다. 그 소중한 것이 너에게 상처를 입히는데도 너는 포기하지 않아서 속상하다. 앞으로 이런 것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얼마나 너의 소중하고도 그 하찮은 것을 인정해 줄 수 있을까, 뚝뚝 떨어지던 너의 눈물을 보며, 주차된 차 옆 그 길 가에 유리조각들을 버리며, 그런 생각을 했던 죽변항이었다.     

나는 어릴때공중 목욕탕에 가 본 일이 단 한번도 없어서 남들 다 있다는 공중 목욕탕에 대한, 목욕후 요구르트나 목욕후 병우유에 대한 추억이 없다. 온천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온천에 들어가고 나오는 절차는 오랫동안 쭉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으며 뜨거운 물에 오래 있지도 못한다. 이런 나와 달리 온천을 무척 좋아하는 둘째는 나오지 않으려는 덕분에 온천은 거의 둘째를 '위해서' 버티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온천을 장소로서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가 비로소,단체로 우리가 무방비해지고 왠지 공평해지는 그 장소를 말이다. 오래된 유황온천인 그 곳은 쪼끄만 여섯 살짜리가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하는 이외에도, 재미있는 곳이었다. 심상한 시골 할머니들이 고된 노동 사이에 잠시 모든 걸 내려놓는 따뜻한 그 증기속에서 "그 집은 절임배추 해다주고 돈을 벌었대." “올해는 절임배추를 많이 하대.” 하는, 대화를 엿들으면서, 어쩌면 내가 모르는 세계가 이리도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마저. 이것이 바로 온천에서 내가 배운 것이다. 어쩌면 온천에서 늘 처음 보는 할머니들과도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는 둘째 아이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장수탕 선녀님도 여럿 뵜을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돌아온울진여행은,마치대륙횡단이라도 한 듯한 뻐근함과 노곤함, 뭔가 모를 성취감을 주었다. 오며 가며 지나친 고래불이니, 망양이니 그 바다때문에 그 곳은 또 가야할 곳이 되었다. 앞으로 또 갈 곳이 많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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