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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Nov 17. 2019

걷기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갑자기,아침 걷기를 시작했다. 무엇이든 습관의 문제인건지, 사흘 정도 아침에 억지로 걷다보니 그 다음에는 나가는데까지 결심하는 시간도(사실 이게 제일 길다), 준비하는 시간도(그 다음 장애물이다) 확 줄었다. ‘습관의 힘’ 같은 책을 읽고 난 후도 아니었는데. 모두들 회사로 학교로 보낸 8시 즈음 그저 잠옷을 반바지로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이어폰을 챙겨 집을 나선다.

대로에서 한참 쑥 들어와있는 아파트 단지라 딱히 탐험할 곳도 없고, 한 바퀴 돌면 40여분이 걸리는 주변에 큰 저수지로 간다.

일단 저수지 둘레길로 올라서서 조금만 걸으면 양쪽으로 엄청나게 긴 잡초들이 마치 문처럼 드리워져있고, 유난히 긴 잡초들을 헤치고 나가면 그 사이에 눈이 시리도록 붉고 잎이 파르라니 종잇장같은 양귀비가 피어있다. 빨간색만 있었는데 오늘은 연한 분홍빛 양귀비도 보았다. 바알간 양귀비가 제일 예쁜줄 알았는데, 홀로 핀 연분홍빛 양귀비에 눈길이 간다. 역시 차별화가 중요하다.

양귀비 코너(?)를 지나면 마치 모네의 '지베르니의 정원' 이라도 보는 듯이 보라빛,분홍빛, 하얀빛의 여름들꽃이 길 양옆으로 가득한 언덕배기를 오른다. 이 장면만큼은 어떤 미술관도 부럽지 않다.모네 코너를 올라서서 지나고나면 금계국이 가득하다. 며칠내 금계국들만 봤는데, 오늘은 금계국 비슷하게 생겼는데 꽃잎 안쪽에 빨간 색칠을 더한 듯한 쨍한 인상을 주는 꽃들이 피어있어 검색해보니 (다른 말로 가는잎금계국인) '기생초' 란다.노란 꽃잎 안에 빨간 무늬. 혹자는 화려해서 더 슬프다고. 그러나 꽃까지 동정하지는 않기로 한다.

기생초에 잠깐 눈길을 주고 계속 걷다보면 이제 나무도 꽃도 없는 땡볕의 길이다. 목을 축이러 날아온 커다란 백로가 저수지 주변에 내려앉는 걸 본다. 저 백로는 물이 어디어디 있는지 다 기억하고 있겠지. 그렇게 목적지를 정하고 날아오르는 거겠지. 이 땡볕 길의 어디쯤 날파리떼를 팔로 젓다가, 아주 작은 사마귀를 발견하고 아이들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는다.

드디어 저수지의 완전한 반대편에 도착하면 잔디로 된 언덕길이 나와서 기분좋게 흙길을 걸어오른다. 플레이리스트를 빠른 노래로 바꿔 마치 러닝머신 위에서 속도를 높인 듯 잰 걸음으로 걸어도본다.

이렇게 걷고 돌아서 다시 왔던 길, 땡볕 날파리떼와 사마귀풀숲과 금계국 군락지와 모네 언덕, 양귀비 길목을 지나 집으로 돌아와서 커피캡슐을 내린다. 언제부터였나, 걷기 예찬이 있어왔던 것이. 걷는 동안에 나의 온 몸은 오직 걷기위해 오늘 아침 일어난 것처럼 기꺼이 작동한다. 어떤 목적도 없이 걷는 것, 한 마디로 걷기가 너희를 자유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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