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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Nov 17. 2019

책임이 우리를 살게 한다

정직하게도,환절기엔 의례히, 겨울 내내 웅크리고 있었기에 갑자기 운동한다고 걷겠다고 나가고, 조금 왔다갔다 한 것 뿐인데도 감기 몸살이 온다.

눈이 멀 것 같은 햇살을 그렇게 창밖으로만 건성으로 보다가 4월이 사흘이나 지나서야 버스를 탔다. 옆 도시로 넘어가면서 밭이 펼쳐진다.변두리에 사는 즐거움이다.  버스 창밖으로 무겁게 꽃을 이고 있는 벚나무를 보다가, 그러다 숨을 흡, 들이마셨다. 복숭아꽃이 피었던 거다.

남쪽 도시로 이사와서야 알게 된, 유화같은 겹겹의 분홍색인 복숭아꽃. 벚꽃을 제치고 최애봄꽃으로 등극한,나의 복사꽃.벚꽃은 벚꽃대로 보편적인 환희라면 복사꽃은 좀더 특별하달까.

지나가다가 보인 지난 겨울 늦은 오후, 나에게 집에 돌아가고 있는데도 빨리 돌아가고싶은 기분을 안겨주었던 그 버스 정류장에는 깜짝선물상자에서 나온 듯한 벚꽃나무가 있었다. 저기에서 이따가 되돌아갈 버스를 기다릴 생각만 해도 절로 흐뭇한. 그런 햇살속에서 나는  마트안으로 쏙 들어가버렸지만 말이다.

만우절에는 그 날 세상을 등진 장국영을 떠올리며 생각했었다. 의무감, 책임감때문에 산다고 하소연하긴 해도 사소한 챙김들이 서로를 살게 하는 것. 단순히 어떤 일을 반복하는 일상이 나를 버티게 하는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주는 것, 받는 것이 삶을 버티게 한다. 사랑의 황홀경이 아니라 돌보고 돌봄받는 의무,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한다. 그것이 우리를 오리엔탈 만다린 호텔에서 뛰어내리지 않게 한다.잔소리하고 잔소리듣고.(요즘 잔소리 줄이기 운동을 내부적으로(내 마음속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빗방울에도 맞아 죽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빗방울에도 맞아 죽을까 걱정하는 내 마음이 나를,우리를 살게 한다.

아무리 그걸 곱씹어도 때로는 권태롭고 이기적이 되고 피로해지더라도, 그렇더래도,시간과 감정을 내어서 쭈꾸미를 먹으러가고 강가의 카페에 데려다주고 죽과 도시락을 사다주고 그런 것들을 잊게 되지는 않는다. 오늘 다시 벚꽃잎들이 바람에 눈처럼 나부끼듯, 그렇게 마음속에서 일렁일 것도.  오늘은 내가 네게 빚지고, 내일은 네가 내게 빚지고. 그렇게 시간차로 용인해주자.

버스 정류장 옆 벚나무 한 그루 아래서 아이들 옷 한벌씩 든 쇼핑백을 들고 그렇게 잠깐, 걸맞은 감상을 한껏 부려놓고는, 눈을 몇번 꿈뻑거리고는 버스에 올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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