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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Nov 17. 2019

머무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

또 한번의 가을이 왔고, 화분에 씨앗을 뿌렸었다. 7-9월에 파종하는 꽃이라 했다. 그러나 꽃씨는 싹을 전혀 틔우지 않았다. 대신 새들이나 혹시 와서 먹으라고 화분주위에 뿌려놓은 차조가 굴러들어갔는지 삐죽하고 가느다란 볏잎같은 잎이 돋아났다.     

나는 이 도시가 권태로웠고, 미웠다. 통창 가득히 보이는 산과 나무는 이 아파트가 아주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가득히 숨막힐듯한 햇살은 이 집이 내 고향 서울보다 멀리 멀리 떨어진 남쪽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일주일내내 집에만 있었던 적도 많았다. 인간이란 늘 자신이 자고 일어나는 그 곳만을 미워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습관인가보다.

그러다 어쩌다가, 영화를 보고, 약속을 잡고, 무료 영어회화 강의를 신청하고 연달아 나갈 일이 생겼다.

버스를 타고, 갈아타고, 걷다보니 조금씩 이 도시가 눈에 익어갔다. 구청에서 해주는 무료 영어회화를 신청했다. 강의실까지는 걸어다니면 충분히 운동도 될 듯 했다.

또다시 가을의 저수지를 걷는다. 수레국화도, 양귀비도 사라진 그 길에는 한참 뚱딴지꽃이 피더니, 이젠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억새들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였다. 억새는 정말로 줄기가 억세서 아침 산책의 전리품으로 쉽게 가져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어쩌다 길가에 떨어져있는 억새만을 몇 개 가져가서 집안 바구니에 꽂아두었다. 바싹 말라서, 어떠한 생물체도 느껴지지 않아 성가시지 않는 억새에서 ‘늙음’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나팔꽃이 피고 지는 동안에도 많은 꽃들이 자기들만의 시간표대로 성실히도 피고 지고 씨를 뿌려 부려놓았다.     

오늘은 어떤 노부부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노랗고 작은 송이의 국화꽃들을 가득 꺾어서는 서둘러 꽃봉오리만을 따서 넣고 계셨는데, 꼭 어린 날 그렇게 모여 앉아 하던 소꿉놀이가 떠올랐다. 너무도 소중한 그 꽃들. 약초일래나, 아마도 꽃차를 만들려고 하셨나보다. 성실한 인생이란 세월을 돌아와 앉아 유년의 모습처럼 소꿉놀이를 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일까.  

 한껏 비밀스럽게 쓸어담는 모습을 보자니 저 꽃이 뭐라고, 분명 소중한 것= 돈되는 것이다. 약초일래나?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장에 가서 그 국화의 정체를 알았다. 장 한켠에 바싹 마른 국화꽃송이들을 팔고 있었다. 검색해보니 '금국'. 씻어 데쳐서 바싹 말려서 국화차로 마시는 것이다. 운동길 지척에 피어있지만, 잠재적 현금덩이들이 그렇게 흐드러져있지만, "그걸 언제 말리냐.." 하며 매 운동길마다 그냥 몇 송이만 꺾어서 물병에 꽂아 놓고 보는 사람이 나다. 

모험이 어쩌고 하지만 지척의 꽃 꺽어 말리기도 귀찮아서 티백 홍차를 마시는 사람이 나인데.     

어느 비오고 갠 날엔 고작 강아지풀과 아카시아 나무들로 무성할 뿐인 길이 밤새 내린 이슬로 장식보다 반짝였다. 그 누가 다듬지 않았지만 나는, 신들이 만든, 신이 매만진, 신들의 정원을 매일 걸은 것이어서, 마당이 있고 철마다 꽃씨를 심는 이들에 대한 부러움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행복이 늘 찾아 떠나는 대상이 되면, 행복은 여기 없는 것이 된다고 법륜스님이 말하셨던가. 사실은 머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머물러라. 더 많이, 더 깊이, 더 오래. 그래서 권태가 짓물러 고름이 되고 또다른 깨달음의 새 살이 나올때까지 우리는 수행하는 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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