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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Jul 09. 2020

필연이란

둘째가 학교에 가는 날 아침. 아직 아기티가 남아있는 잠든 얼굴을 몇초간 훔쳐보다가, 깨우면서 종아리 뒤의 빨간 자국들을 발견하고 저절로 "모기한테 물렸나? 어젯밤 엄마방에 있던 모기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하다가. 아. 이 말은. 여름에 엄마에게 늘 듣던 말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는 나를 보았다. 그 때, 나는 강산이 네번 바뀌거나 그 전에 네번 바뀌고 또 열번 바뀐 그 모든 그 일련의 과정들이 (고작) 여기까지 오게 될 필연이었음을 깨닫는다. 자고 나면 또 조금씩 자라있는 아이의 얼굴을 그 어떤 보고서의 오타를 찾아내듯 바라보는 일들도. 엄마가 그렇게 나를 보던 그런 것들에 숨막혔던 일들도. 그건 모두, 우주의 섭리였던 것이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도, 몇 광년을 지나도 변함이 없을 필연. 나는 수십년이 지나 내 아이에게 똑같이 모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모든 고민들과 선택에 따른 두려움 같은 것들이 약간 가볍게 느껴진다. 



여름휴가도 신나지 않고 누가 누가 더 큰 일이 났나 자랑에 낄 자극적 사건들도 전혀 없는 요즘. 마치 내 생애 가장 긴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아이 둘이 번갈아 학교를 가고 있어 매일 삼시 세끼를 하고는 있지만, 마치 언젠가의,나에게도 분명 있었던, 그 여름방학처럼 무료하고 꿈같이 몽롱하고,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계속 현실에서 몇센티는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곧 이것이 바로 진짜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여름방학이 지나고 나면 문득 선뜩한 바람속에 가슬해진 피부와 비죽 큰 키로 또 얼만큼 자라 있음을 문득 느끼게 될테니, 필연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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