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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망버드 Apr 07. 2021

결혼기념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복사꽃이 피는 계절에 결혼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인줄만 알았는데, 남쪽으로 이사를 오니 복사꽃(복숭아꽃) 천지였다. 마치 캔버스에 진분홍과 그 사이의 분홍, 하얀색을 여러겹 덧바른듯 황홀한 그 복숭아꽃밭 근처 버섯전문식당에 몇년간 의식처럼 가서 버섯으로만 만든 버섯요리코스를 둘이서 먹곤 했었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 신혼초부터 결혼기념일 즈음에 남편이 항상 폭풍우몰아치듯 바빴다는 것을. 결혼한 첫해 결혼기념일에는 프로젝트 마감이 다가와서 그다음날 새벽에 들어왔었다. 그 다음해에도 비슷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서운했나? 하면 그건 아니다. 결혼기념일 즈음엔 항상 엄청 바쁜 징크스가 있잖아! 큭큭 이렇게 웃을 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결혼기념일을 제대로 의식하지 않았을 때의 삶은 그 나름대로, 아니면 오히려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모든 날들이 연두빛 새순처럼 빛나고 있었으므로.


그렇지만 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은  어떤 날인가?과연 기념할 날인가?ㅋㅋ 생판 남이던 사람이 만나서 같이 (당분간은) 살기로 약속한 날이다. 그리하여 현재 존재하는 가족이 존재할 가능성을 좀더 높여준 날. 생일이나, 회사창립일처럼 그냥 나에게 주어진 날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는 거의 최초로 결정한 날. 사실상 '수동'모드에서 '능동'모드로 전환하는 날.

(이것도 엄마가 절에서 받아온 날짜 중 하나였지만. 엄마는 우리가 2월초나 4월초 받아온 두 날중 하나로 해야 (파탄안나고) 잘 산다고 주장하셨다.그래서 1월초에 결혼하기로 결심한 우리는 3개월만에 결혼식을 준비해야만해서 회사를 다니던 나는 식장에 들어갈즈음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날짜면 날짜, 연애기간이면 기간, 결정방식이면 방식, 상황이면 상황,이런 에피소드 한두개, 히스토리 한두개쯤 없는 결혼이 어디 있으랴. 어쨌든 거의 모두의 결혼은 그렇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절차의 방식 속에 몇프로의 낭만을 갈아넣는 과정으로. 돌이켜보면 진짜 철부지 어린애였던 나는 그저 드레스 고르고 신혼여행지 고르는 게 재미있었을뿐.


그리하여 그 결혼기념일, 우리가 스스로 정한 그 날짜는 이렇게 매년 돌아온다. 그때 철몰랐던 나처럼 그저 꽃소식만 들려오는 계절에.

우리는 같이 복숭아꽃이 만발한 곳에 있는 버섯전문식당에 가서 버섯코스요리를 먹거나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둘이서만 제주도에 갔다오거나 비오는 날 택시를 타고 코딱지만한 아주 작은 식당에 스파게티를 먹으러 가거나 했다.

"같이 결혼한 날인데 왜 남편만 아내에게 선물해? 서로 같이 선물해야지."라고 말하는 신박하게 진보적(?)인 남편 덕분에, 일방적인 깜짝 꽃다발이나 금일봉(?)같은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 같이 결혼하기로 해놓고 왜 그날만 생일마냥 부인만 축하받아야 하는 건지 좀 의아하긴 하다. 그리하여,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축하받는 것도 내세울 것도 아닌, 우리 둘만이 온전히 기념하는 날이라는 방침 아닌 방침을 내렸는데 이제 좀 커서 결혼이 뭔지 알게 된, 왜그런지 그렇게 남에게 선물하는 걸 좋아하는 둘째가 제 용돈으로 굳이 우리 결혼기념일에 뭘 사준다고 그래서 조금 난처하다. 역시 삶이란 언제나 변하는 원칙, 그 자체인가보다.


그래서 또다시 기념일날 너무도 바빠 출장을 다녀와 예전의 전통을 지켜주는 남편 대신 둘째가 하교길에 자전거를 타고 꽃집에 가서 사 준 꽃다발속의 은은한 프리지아 향기를 맡으며 생각한다.

결혼기념일은 다른 어떤 축하받을 일도 아닌, 스러졌던 수많은 맹세와 결심들이 다시 돌아오는 계절처럼, 다시 돌아오는 기념일처럼 그렇게 홀연 돌아오는 날이라는 것을. 쨌든 결혼이란 변함없이 아침으로는 주먹밥을 먹고 설겆이를 하고 음식쓰레기를 버리고 앞치마에 물기묻은 손을 닦는 날들이고 처음 그 날엔 짐작도 상상도 할 수 없었거나 어떤 이상과는 다른 엉뚱한 현재일지라도, 다시 그 속에서도 눈치챌 수 있는 딱 이 프리지아 향기만큼의 특별함을 기억하고 살아가야함을 또한번 약속하는 날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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