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요?
9월이 되고 나서 하루하루가 마치 KTX를 탄 사람처럼
창 밖을 내다봐도 휙휙 지나간다.
예전에 무궁화호나 새마을호를 탔을 때처럼
철커덩 철커덩하면서 풍경과 내가 만나는 여유가 없어졌다.
원하든 원치 않든 내 눈앞의 장면은 빠르게 휙휙 지나간다.
어제도 오늘도 구글 캘린더에서 사는 사람처럼 일정 박스 안에서 살고 있다.
어제를 음미할 틈 없이 오늘을 살기 바쁘다.
어제는 연기자를 꿈꾸는 아들과 뮤지컬 ‘빨래’를 보러 갔다.
월급쟁이의 하루하루는 내 계획이 있더라도 업무 일정에 밀릴 때도 있어서 평일 저녁 일정을 사수하기 위해 저녁 일정이 없는 날에 좀 더 집중해서 일을 하곤 한다.
어제는 한 시간 일찍 끝나는 수요일이었지만 한참 올해 사업보고와 평가를 하는 기간이라서 괜한 눈치가 보였다. 워낙 회사에서 위아래 옆 눈치를 안 보게 평소에 당당하게 일을 해두지만 한 해 농사를 평가하는 업무를 하다 보니 괜스레 먼저 퇴근하기가 미안하고 눈치가 보였다.
새로운 팀에 와서 새로운 업무를 하는 첫 해라서 긴장도도 높고 일정에 대한 감각도 조금 떨어지다 보니, 한창 바쁜 시기에 아들 생각만 하고 뮤지컬을 예약해 둔 터라서 먼저 퇴근하면서 마음이 시끄러웠다.
일정에 대해서 탁월한 감각을 가진 PM으로 산지 16년이지만 (프리랜서 포함 20년)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업무를 하다 보니 아직은 좀 낯설다. 어제를 위해서 미리 일을 해 두어서 일정 문제도 없지만 괜스레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불편한 마음을 다독이며 대학로에 도착해서 학교에서 바로 와서 피곤해하는 아이를 만났다. 고 1인 아이도 학교 가랴 연기 학원 가랴 과외받으랴 하루하루가 참 바쁘다.
그래도 잠시나마 여유를 즐기며 그 오래된 대학로 KFC에 갔다. 혜화역 앞에 있는 KFC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주연: 감우성, 엄정화)에도 나온 만남의 장소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서 나를 반겨주니 참 반가웠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대학로에서 사람을 만날 때 가장 만만한 장소가 혜화역 앞 KFC였던 그 시절엔 대학로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참 부러웠다. 대학로 근처 학교에 다닌다고 맨날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는 것도 아닌데 뭔지 모를 대학의 낭만이 흐르는 ‘마로니에 공원’을 거닌다는 생각을 하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땐 그랬다.”
남편을 처음 만난 곳도 대학로였다.
그땐 문화비를 내고 들어가는 신개념 문화공간 ‘민들레영토’도 대학로의 단골 만남의 장소였다.
아들에게 엄마 아빠가 처음 만난 곳이라고 다른 곳이 된 그 건물을 가리켰다. 아들은 신기해하며 그렇구나 하며 잠시 그 건물을 바라봤다. 아들의 리액션은 단순한 예의상 리액션에 불과했지만 나는 연달아 사진을 찍었다.
그 건물 앞에서 흰색 셔츠의 남편이 나를 반겨줄 것만 같았다.
이젠 출퇴근하며 내 인생을 담보로 월급 받는 월급쟁이이지만 그땐 참 꿈 많은 대학원생이었다. 가난해도 용감했고 하루하루 꿈꾸며 설레었던 청춘이 그립다.
중년의 깊이가 있는 지금도 좋지만 젊음 외에 가진 것이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만했던 그때가 그립다.
그때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도 호기롭고 활기찼는데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지금의 삶은 왠지 쓸쓸하고 허하다. 아이들은 20대와 가까워졌고 나는 50대가 가까워져 가는 날들을 살아가고 있어서일까?
지금은 왜 일하냐고 물으면 그냥 한다고 하겠지만
그땐 일할 수 있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직장인이 되면 경제적 자유를 얻을 줄 알았던 거 같다. 지금은 그게 아닌 걸 잘 알지만…
레버리지라는 매력적인 개념을 알고 실행하고 싶지만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경제적 자유는커녕
레버리지를 만드는 건 꿈도 못 꾸고 있다.
어제 빨래를 보면서 ‘슬플 땐 빨래를 해 ‘라는 노래가
참 와닿았다. 세탁기로 빨래를 하고 건조기로 말리며 살다 보니 빨래를 탁탁 털어서 빨랫줄에 널 일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그 감성을 아는 사람이니까.
오늘도 먼지를 터는 기분으로 빨래를 하고 널어놓는 마음으로 빨래 대신 마음 일기를 쓰며 퇴근한다.
솔솔 부는 가을바람이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털어주니 기분이 좋아진다.
서울살이 몇 핸가요?
서울 살이 여러 해, 당신의 꿈 아직 그대론가요?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나요?
빨래처럼 흔들리다 떨어질 우리의 일상이지만
당신의 젖은 마음 빨랫줄에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 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꾹 짜서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 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털털 털어서 널어요 우리가 말려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