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곁들인.
기분이 좋고, 기운이 넘치면 기분이 모든 것을 좌우할 것 같다. 귀찮은 일, 하면 되지. 돈? 벌면 되지! 천천히 다 하면 되지!!! 하지만 기분이 가라앉을 땐 기분 따위가 무엇도 바꾸지 못할 것 같다. 기분이 좋으면 뭐, 갑자기 건강해지나? 통장에 잔고가 쌓이나? 기분 그거 너무 찰나 아닌가?
기분이 괜찮을 땐, 이래서 기분을 관리해야 하는구나 싶지만, 할 일은 늘 있고 난 할 일 앞에서 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기분으로 할 일을 미뤄본다.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오길 기다리는 것,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 우린 이미 그런 것은 날씨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따라 다닐 때 아주 간혹 주어진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다. 기분도 그런 것 같다. 그저 좋아지길 기다리면 원망만 생길 뿐이다. 하지만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좋은 기분을 찾아 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반짝이는 것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주 손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힘들이지 않고 조금씩 더 나은 기분으로 향해야 한다.
가장 쉬운 것은 언제나 먹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는 것보다 안하는 게 쉬운데 먹는 것은 그렇지 않다. 안 먹는 것이 제일 어렵다. 무엇을 먹을지 떠올리는 것부터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들뜨기 시작한다. 찜찜한 기분이라면 개운한 맥주가 좋을 것이고, 우울한 기분이라면 달콤한 디저트가 적당할 것이다. 휑한 기분이라면 따뜻한 차 한잔이 그 자리를 채워줄 것이다. 음식은 어디서나 어느 기분에나 적합한 것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의 기분을 음식에 의탁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지난 주말 산 아래 위치해있는 전망 좋은 카페에 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주차장을 잘못 들어 차를 돌리다 보이차카페를 발견했다. 보이차 마셔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바퀴같이 커다란 대용량의 찻잎과 이게 얼마짜리인지 아냐며 운을 떼는 사람들 덕에 보이차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여둘톡을 들으며 보이차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었고, 서울에 보이차 찻집에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무실 빌딩같던 그곳에 입장했다.
사장이 아닌 직원 분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메뉴엔 생차 숙차 그리고 다도체험이 곁들여진 백차와 월광미인 등이 있었다. 몇가지 질문을 하니 배우고 있지만 설명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 하셨고, 고민 끝에 월광미인을 마시기로 했다.
오랜만에 차판 앞에 앉으니 대학 시절 교양으로 들었던 차수업이 떠올랐고, 차판을 사려고 고민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차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차를 마셔 온지 벌써 20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차 박람회며 다도 수업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후변화로 차는 점점 더 맛이 없어지고 있다. 양질의 찻잎을 구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마시자 속이 편안해졌다. 이틀 전 과음한 기운이 그제서야 날아가는 것 같았다. 카페는 자리가 넓었고, 손님은 우리 뿐이었으며, 창밖으론 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따듯한 차를 마시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차디찬 물과 냉침한 녹차로 긴 여름을 지나고 있었으니까. 쾌적한 공간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는 끈적이는 일상에 뒤덮힌 나를 살짝 들어올려주는 느낌이었다. 꾸역꾸역 한 번 들쳐는 보고 반납해야지하고 가져온 책 세 권을 가벼운 마음으로 훑어볼 수 있었다. 삼주동안 마음의 짐처럼 가지고 있던 책들이었는데 말이다. 커다란 테이블과 여러 차 도구들, 초록을 볼 수 있는 창문과 적당한 음악소리와 몸에 닿지 않는 에어컨 바람 속에서 몸과 마음이 평온해졌다. 좋은 것만 빼먹고 뒷정리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평온을 더 했다. (여기까지 적으니 돈이 최고인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
좋은 기분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의욕있는 내가 나는 좋은가보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내가 못나보이는 것 같고. 좋은 시간이었다. 양질의 차를 더 준비해두어야겠다. (끝까지 돈이 최고인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