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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러게요 Sep 11. 2024

가슴가리개

 지난 주말 연천에 갔다. 연천 전곡리는 구석기의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으로 구석기 체험관이며 박물관이 꽤 큰 규모로 마련되어 있다.

 3학년인 아이는 그다지 관심 갖지 않았지만, 학부모가 된 이상 연천에 왔으니 구석기 문화 체험 수업을 신청했다. 이 체험은 꽤나 유익하고 다양한 체험이 마련되어 있어 추천할만하다. 

 구석기 공원에는 구석기에 살던 동물들과 구석기인들이 생활하는 모습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막집 앞에서 불을 피우고 있고, 한쪽에선 사냥도 하고 있다. 어른과 아이로 이루어진 무리의 모습이다. 어른들은 가죽인지 풀인지 원재료를 짐작할 수 없는 그런 엉덩이가리개를 입고 있었고, 앉아있는 모습에선 아무것도 안 입고 있기도 했다. 그 시절에 옷을 만들기는 여의치 않을 테니 이해할만하다. 어린아이들은 안 입은 쪽이 많았다. 그리고 문제는 또 여자 구석기인인데, 모두가 아래만 가리고 있는 형태였다. 입구에는 남자, 여자, 어린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처럼 보이는 조형물이 환영한다는 서있었는데, 크기는 성인보다 조금 큰 크기였다. 지나가던 남자아이가 여자 구석기인 가슴팍을 겨누어 주먹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열 살 정도의 아이였고, 엄마도 곁에 있었기에 시늉으로 지나갔고, 내 입장에서도 여자 가슴이 신경 쓰였나 보다 싶은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체험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이가 왜 여자가 위에 옷을 입지 않았냐고 물었다. 보기에 좀 부끄러웠나 보다. 여자만 가슴을 가리는 건 문화적인 문제다. 꼭 가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는 지금도 가슴을 가리지 않고 지내기도 한다. 이야기를 했다. 괜히 덧붙여 가슴을 가릴지 말지는 스스로 고를 수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말을 했다. 아이는 모든 것이 부끄럽고 예민한 아이여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슴을 가리는 게 맞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여자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말도 해보다가, 그렇다고 내가 정말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하길 원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찜찜했다. 사회는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을 텐데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내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 있어 왜 어떤 것은 내가 포기하고 말지 싶어지는 걸까. 코르셋까지 가지 않더라도, 겨우 노브라로 다니는 것까지 불편한 일 만들 바에 내가 불편하고 말지 싶어지는 걸까. 나에게 적용하면, 기력이 달려 피곤해진 상태인 것 같고, 아이에게 적용하자면 세상에 괘씸죄라는 것이 너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괘씸죄 그러니까 이건 '내 기분 상해 죄'인데,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힘의 기울기 안에서 남자들은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에서 생기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겨우 노브라로 거리를 나간다는 것이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의 힘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여자가 자신의 몸을 어떤 남자의 소유물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기분이 상해버리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걸 처단할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정말 웃긴 일이다. 하지만 우린 겨우 이 정도의 자유에 죽고, 다친 여자들을 봐왔고, 웃통을 벗고 다니는 것이 아닌 겨우 겨우 얇은 속옷 한 장 안 입은 것으로 무슨 페미니즘 활동가 선봉장 취급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우리는 또 지난한 역사 속에서 앞장 서면 제일 먼저 죽는다는 것을 학습해 왔기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몸사리기를 피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방법은 하나겠지 모두가 선봉장이 되는 것, 세상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살아남기와 모두가 선봉장이 되는 것이 양립가능한 것인지 지금은 모르겠다. 하지만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또 더 긴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은 싸우며 살아남은 시기라는 짧은 점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쓰다 보니, 어제 산호가 죄다 녹아서 사라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어차피 인류는 곧 사라질 텐데 적당히 살까 싶어지기도 한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 걸까. 다 같이 사라질 것이라는 게 희망일까.


여담으로,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를 쉽게 쓰고 싶었는데 세상이 이렇다 보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런 것뿐이네요. 기후위기와 한남위기 한국망조위기 속에 살고 있고만요. 볕의 색은 가을인데 뜨겁기는 한여름보다 더 하니,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전쟁으로 망하는 게 빠를까 기후위기로 망하는 게 빠를까 이런 생각만 드는 날들이네요. 그래도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게 더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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