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듄" 이야기를 곁들인
당신은 지금 햇살 드는 거실, 내 곁에서, 작은 반상을 펴 놓고, 침실의 경계가 되는 작은 벽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봄날의 파릇한 나뭇가지 위를 통통 튀어 다니며 참새들이 노래 부르듯,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목소리를 종종 내며 보드게임의 카드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카드를 상하지 않도록 덮고 있는 비닐, 나였다면 하찮게 여겨서 버리거나, 1초의 고민 없이 '방치' 결정을 했을 그것들을 하나하나 감별사처럼 살펴보면서, 한 귀퉁이가 찢어진 것은 없는지, 있다면 그쪽을 스카치테이프를 잘라 붙여 하나하나 손보고 있습니다. 또, 오래된 보드게임의 상자가 헐어진 쪽을 좀 더 큰 박스 테이프를 오려서, 헤어진 모서리를 손보고 있습니다.
그 곁에서 공부를 하며, 당신의 그런 모습을 힐끗힐끗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을 글로 쓸까 말까 하다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제는 이 생각을 빨리 글로 쏟아 놓아, 뇌 용량을 조금이라도 비우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야.' 이런 생각이 들어서 쉬는 틈에 어서 이 글을 적어 놓고자 합니다.
언제나처럼, 서론이 길어요.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당신은 주로 괴물 같은 존재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좋아하지는 않는, 공상과학 소설 중, “듄”이라는 작품의 줄거리가 뜬금없이 당신을 보다 생각이 났습니다.
주인공 폴은 공작의 아들인데, 그것도 단순한 도련님이 아닌, 무려 “전 우주를 이끌어 나갈 운명” 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왜인가 하면,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현재로부터 수 만년이 지난 세상인데, 그동안 끔찍한 전쟁으로 인해 지구는 파괴되었고, 새로운 지구를 찾아 떠나간 많은 행성들에서 각각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었어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서로 연락이 되기 시작한 행성들이 서로를 돕는 관계가 되기는커녕, 강한 행성이 약한 행성을 침략하는 우주적 규모의 식민지 개발 및 약탈 상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 ‘베네제세릭트’라는 초인적 능력을 지닌 여자들 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인간을 뛰어넘는 예언 능력과 지도력을 가진 남자아이를 수많은 세대를 거쳐 잉태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는데, 바로 그 결과물에 가장 가까운 아이가 '폴'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을 그 누구라도 깨닫게 된다면, ‘꼿꼿하게 맞춰진 운명의 각’이 너무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겠어요? 마치 오직 한 곳으로 발사하기 위해 제작된 미사일 같은 인생이지요. 그의 어깨에 걸린 무게감은, 지구를 떠받들고 있는 신화 속 존재의 괴로운 모습, 단순한 셈법으로 지구 대 우주라는 크기 비교만 해보아도 그 이상으로 힘들고, 광활한 부담스러움 그 자체였겠지요.
아무 튼요,
근데 한 가지만 더 말하면요, 그런 폴과 그의 대를 이어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자녀의 운명을 “황금의길”로 소설은 표현하는데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 이름도 찬란한 “황금의 길”.
우리 현실에 적용하자면, 그것이 뛰어난 과학자가 되는 것이든, 유명한 법률가이든지, 사회적으로 어떤 높은 위치에 가는 것이든지 간에, 나를 비롯한 많은 또래들이 바라왔던 그것이 아니었나,
또 폴의 어머니를 포함한 베네제세릭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부모들의 바람은, 비록 그 무게를 알면서도, “황금”이라는 수식어가 보여주듯, 독보적인 특별함을 가진 인생을 자녀들이 살았으면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더해서 당신들이 홀로 견뎌온 이 어두운 사막 같은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나 분야이던지 간에 사람들을 이끌어줄 빛이 되어 줄 존재가 자신의 몸을 통해 낳은, 바로 그들의 자녀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나보다 지혜롭고, 현실감각 풍부한 당신은,
'당신 말고 그런 사람이 또 누가 있어?' 하며 코웃음 칠 수 있겠지만요.
더군다나 정작 그런 '원대한 목표'를 어릴 적 잠깐이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말하는 이 사람은,
당신 앞에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이 외적 특징이고,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 가장 큰 내적 특징으로,
'뭔 허무맹랑한 소설 속 내용이 어쩌고...
인류의 앞 날 저쩌고...예지 능력은...
개뿔, 전세 사기나 당하지 마!'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게 당연지사이겠지만요.
이게 무슨 새로운 종류의 ‘저혈압 치료’를 위한 혈압 상승 유도 발언인가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요,
그래도 결론을 듣고 싶을 테니까,
인제 들어봐요.
사실 별것은 아니고요,
당신이 그렇게 작은, 흔하디 흔한, 비닐 하나도 정성스레 손보고, 아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까, 오히려 세상의 짐이 덜어지더란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자연스럽고, 또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들이,
내게는 세상의 무게를 잊은 듯 날며,
노래하는 새처럼 보이고,
기준을 잃은 이 세상에서 리듬을 찾아
지휘하는 손짓처럼 느껴지더란 것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정리하는 기쁨을 알게 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당신의 그 '리듬'에 맞춰서, 내가 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일들 보다는, 내가 만지고,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작은 물건이 어디서 어떻게 나를 바라볼지를 결정하면서 느끼는 '행복' 말입니다.
물론, 나는 자주 그 기준을 잃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전히 자주, 당신의 지휘가 필요하지만요.
당신은 이제 작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그런 당신을 보며, 나는 생각을 마저 정리합니다.
오늘까지 살아왔던 인생이, 당신을 만나서 이미 달라지고 있고, 앞으로는 더욱 달라지겠구나 생각을 합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인생의 '유일한 각'에서 벗어나서요.
나 너무 자유합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당신을 만나 참 자유합니다.
참 고마와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