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NPC였다

by 루케테

댓글창에서 본 문장들


며칠 전, 한 정치 기사의 댓글창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들의 문장은 단호했고, 어조는 절박했다. "나라가 위기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댓글들 사이사이에 또 다른 종류의 문장들이 끼어 있었다.

"저 사람들은 모르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NPC들은 그냥 하루하루 살기 바쁘겠지." "양떼처럼 그냥 따라가는 거지 뭐."

그리고 누군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만이라도 깨어 있어야 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만이라도' - 이 말 속에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머지는 잠들어 있다'는. '우리'는 특별하고, '저들'은 평범하다는. '우리'는 진실을 보고, '저들'은 눈 가린 채 살아간다는.

이것은 걱정인가, 아니면 우월감인가?


우월감의 문법


우월감은 항상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그게 교묘한 점이다.

"나는 약자를 생각한다" - 그래서 너는 약자를 생각하지 않는구나. "나는 책임감 있게 행동한다" - 그래서 너는 무책임하구나. "나는 나라를 걱정한다" - 그래서 너는 무관심하구나.

이 전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을 선의라고 착각한다. "저 사람들이 깨달아야 해", "저 사람들이 변해야 해". 이것은 걱정처럼 들리지만, 실은 판단이다. 연민처럼 들리지만, 실은 경멸이다.

더 무서운 건, 이 우월감이 스스로를 정의로운 분노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자. 누군가 "NPC"라는 단어를 쓴다. Non-Playable Character. 생각 없이 프로그램된 대로만 움직이는 게임 속 캐릭터.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은 자신이 Player라고 생각한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세상의 진실을 보는 사람. 그리고 나머지는? 그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생각 없이 살아가는 배경 인물들.

이보다 더 완벽한 우월감의 표현이 있을까?

"나는 깨어 있고, 너희는 잠들어 있다." "나는 진짜이고, 너희는 가짜다." "나는 주인공이고, 너희는 엑스트라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엑스트라들의 삶


카페 알바생 수진(가명)의 하루를 들여다보자.

아침 6시 기상. 7시에 카페 오픈 준비. 손님들에게 커피 서빙하며 미소 짓기. 점심시간에는 도시락 먹으며 휴대폰으로 드라마 보기. 오후에도 계속 손님 응대. 저녁 6시 퇴근. 편의점에서 저녁 사기. 집에 와서 씻고, 유튜브 보다가 잠들기.

이 삶을 NPC라고 부를 수 있는가?

수진은 알바비로 대학 등록금을 낸다. 부모님께 손 벌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녀는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힘들어도 짜증 내지 않는다. 그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저녁에 혼자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가끔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내일 또 카페에 나가야 하니까, 일찍 잔다.

이것은 생각 없는 삶인가? 무책임한 삶인가?

아니다. 이것은 그저 다른 종류의 책임을 지고 사는 삶이다. 수진은 SNS에 정치 글을 올리지 않는다. 온라인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때로는 지치면서도, 매일을 버텨내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녀를 NPC라고 부른다. 왜? 그녀가 자신들처럼 분노하지 않아서? 그녀가 자신들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아서?


책임의 여러 얼굴


두 아이의 아빠인 민수(가명)를 보자. 그는 회사 다니며 가족을 책임진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8시에 퇴근한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공원에 간다. 아내가 쉴 수 있도록 설거지를 한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다. 대출금을 갚는다. 회사에서는 후배들을 챙긴다.

그는 뉴스를 본다. 나라 상황이 걱정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일 아이들 유치원 보내고, 회사 가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게 더 급하다.

민수는 무책임한가?

아니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책임을 다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려고 애쓰고, 회사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하고, 부모님께 전화 자주 드리고,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것도 책임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유독 '정치적 목소리'만을 책임감의 증표로 여기는 걸까?

은퇴한 부부를 보자. 그들은 평생 성실하게 일했다. 세금 냈다. 자식 키웠다. 이웃과 다투지 않고 살았다. 이제는 조용히 쉬고 싶다. 손주들이나 보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

그들이 거리에 나서지 않는다고 무관심한가? 그들이 SNS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없는가?

택시기사 영호(가명)를 보자. 그는 하루 12시간 운전한다. 승객들과 대화한다. 친절하게 응대한다. 교통법규를 지킨다. 집에 가면 피곤해서 씻고 바로 잔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가? 아니다. 그도 나름의 생각이 있다. 다만 그것을 온라인에 길게 쓸 시간도, 에너지도 없을 뿐이다.


거울 속의 적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좌파는 우파를 비판한다. "당신들은 도덕적이지 않다. 약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파는 좌파를 비판한다. "당신들은 현실을 모른다. 책임감이 없다."

그런데 양쪽 다 똑같은 우월감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옳고, 너희는 틀렸다." 표현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더 웃긴 건, 권력이 바뀔 때마다 이 구조가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보수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 중 일부는 오만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좌경화되었다", "우리만이 나라를 제대로 이끈다". 진보 진영은 이것을 비판했다. 당연히.

그런데 지금은? 진보가 권력을 잡았고, 그들 중 일부가 똑같은 오만함을 보인다. "우리만이 도덕적이다", "우리만이 정의를 이해한다". 그리고 보수 진영이 이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또 무서운 건, 이제 보수 진영 내에서도 똑같은 우월감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만이 깨어 있다", "나머지는 NPC들이다".

우리는 적을 닮아간다. 비판하면서, 똑같아진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월감의 달콤함


왜 우월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까?

그것이 주는 보상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월감은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깨어 있다. 나는 진실을 본다." 이 감각은 중독적이다. 특히 현대 사회처럼 모든 게 불확실하고, 내가 누군지조차 헷갈릴 때, 우월감은 명확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우월감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옳다면,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틀린 건 저들이니까." 세상이 복잡하고 불안할수록, 이 단순한 확신은 위안이 된다.

우월감은 우리를 선하게 느끼게 만든다. "나는 약자를 생각한다", "나는 나라를 걱정한다". 이런 생각은 자기 자신을 도덕적 존재로 인식하게 해준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함정은 여기에 있다.

이 모든 감정이 진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약자를 걱정할 수도 있고, 정말로 나라를 사랑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진심에 우월감이 스며들 때다. "나는 약자를 걱정하는데, 저 사람들은 안 하네" - 이 순간, 연민은 경멸로 변한다. "나는 나라를 사랑하는데, 저 사람들은 무관심하네" - 이 순간, 애국은 단죄가 된다.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


요즘 온라인 공간을 보면 대화가 사라졌다. 남은 건 비난과 조롱뿐이다.

좌파 커뮤니티에 가면 우파는 "수구꼴통", "무식한 사람들"이다. 우파 커뮤니티에 가면 좌파는 "종북", "위선자들"이다. 그리고 양쪽 모두 침묵하는 대다수를 "NPC", "양떼"라고 부른다.

왜 이렇게 됐을까?

우월감이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순간, 대화는 끝난다. 왜? 대화는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하는 건 대화가 아니라 훈계다.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건 대화가 아니라 진단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서로를 상대로 훈계하고, 진단하고, 계몽하려 든다. "당신은 이것을 몰라서 그래", "당신은 아직 깨닫지 못해서 그래".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더 심각한 건, SNS 알고리즘이 이 우월감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모이고, 서로의 확신을 강화하고, 반대편은 점점 더 악마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극단으로 간다. "상대편은 대화가 안 통해", "그들은 이성이 없어", "그들은 세뇌당했어".

그런데 상대편도 똑같은 말을 한다.


침묵하는 다수의 지혜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한국 성인의 약 60-70%는 정치적 견해를 SNS에 거의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온라인 논쟁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자기 삶을 산다.

이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쪽에서는 말한다. "무관심한 대중", "생각 없는 사람들". 다른 쪽에서도 말한다. "깨어나지 못한 양떼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건강한 사람들일 수 있다. 정치적 견해를 가지되, 그것에 자기 정체성 전부를 걸지 않는 사람들. 사회 문제에 관심 있되,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 사람들. 자기 의견이 있되,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착각하지 않는 사람들.

물론 진짜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성숙함의 표현일 수 있다.

민수처럼, 정치적 견해는 있지만 가족을 돌보는 게 더 급한 사람. 수진처럼, 세상 돌아가는 게 걱정되지만 당장 내일 일어나서 일해야 하는 사람. 은퇴한 부부처럼, 평생 성실하게 살아왔고 이제는 조용히 쉬고 싶은 사람.

이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방식대로 책임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선


여기 두 사람이 있다.

A는 매일 SNS에 정치 글을 쓴다. 시사 유튜브를 본다. 온라인 토론에 참여한다. 그는 자신이 책임감 있게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B는 매일 출근해서 일한다. 동료를 돕는다. 세금을 낸다. 이웃에게 친절하다. 그는 자신이 성실하게 산다고 생각한다.

둘 중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

이 질문 자체가 함정이다.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A는 사회적 관심을 통해 책임을 표현한다. B는 일상적 성실함으로 책임을 수행한다. 둘 다 가치 있다. 둘 다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선을 긋는다. "이쪽이 옳고 저쪽이 틀렸다"고.

더 위험한 건, A가 B를 보며 "저 사람은 무관심하다"고 생각하고, B가 A를 보며 "저 사람은 현실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서로가 서로를 재단하기 시작하는 순간.


확신과 겸손 사이


그렇다면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다.

신념을 가져야 한다. 명확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필요할 때.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분명하게.

하지만 방식을 바꿔야 한다.

확신을 가지되, 겸손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와 "나만이 옳다"는 다르다.

비판하되, 존중해야 한다. "당신의 의견은 틀렸다고 생각한다"와 "당신은 멍청하다"는 다르다.

설득하되,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도 있다"와 "당신은 이것도 모르나"는 다르다.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이 차이가 전부를 바꾼다.

어떤 사람이 블로그에 긴 글을 썼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담은 글이었다. 하지만 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 한 문장이 모든 걸 바꾼다. 이것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의 초대다. 이것은 선언이 아니라 제안이다. 이것은 심판이 아니라 탐구다.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


최근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흥미로운 광경을 봤다.

정치적 견해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토론을 벌였다. 처음에는 팽팽했다.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사람이 이렇게 썼다.

"사실 저도 확신은 없어요. 그냥 지금으로서는 이게 맞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요. 다만 우선순위를 다르게 보는 것 같아요."

그러자 상대방도 태도가 바뀌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제가 놓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단 두 문장이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갑자기 그들은 적이 아니라, 다른 관점을 가진 동료 시민이 되었다. 이기거나 지는 게 아니라, 함께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화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변했다. 댓글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비난이 줄어들고, 질문이 늘어났다.

대화의 시작은 "나는 틀릴 수 있다"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약함이 아니다. 이것은 지성이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이것은 성숙함이다.


결국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진보도, 보수도 -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다.

우리는 모두 확신하고 싶어 한다. 불확실함은 불안하니까. 우리는 모두 특별하고 싶어 한다. 평범함은 외로우니까. 우리는 모두 옳고 싶어 한다. 틀리는 건 두렵니까.

그래서 우월감이라는 마약에 손을 댄다. 그것은 달콤하다. 안전하다. 하지만 중독될수록, 우리는 더 외로워진다. 더 분노하게 된다. 더 불행해진다.

진짜 용기는 우월감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확신하지만,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 "침묵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책임지고 살아간다"고 존중하는 것.

이것은 약함이 아니다. 이것은 강함이다. 확신 없이 흔들리는 게 약함이라면, 확신을 가지되 교만하지 않은 게 진짜 강함이다.


에필로그: 거리에서


어느 평범한 오후의 거리.

한 청년이 카페에서 커피를 만든다. 한 남자가 택시를 운전한다. 한 여성이 아이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한 노인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를 모른다.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모른다. 그들은 서로의 고민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이유로 살아간다. 각자의 책임을 진다.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버텨낸다.

누군가의 눈에 그들은 NPC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 각자에게, 자신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모두 NPC였다.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이다. 자기 삶이라는 서사 속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월감은 사라지고,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평등의 역설: 진짜 평등과 거짓 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