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를 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있다. 주요 문학상을 받는 작품들, 평단의 호평을 받는 소설들, 대형 출판사가 밀어주는 신인들. 거기에는 어떤 경향성이 있다. 불평등을 다루거나,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사회 구조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약자의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내거나. 이런 작품들이 '문학적'이라고 평가받고, '깊이 있다'고 인정받는다.
반대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거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거나, 시장경제의 논리를 긍정하거나, 질서와 안정을 지지하는 작품은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놓인다. 설령 대중적으로 성공해도 평단의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 '문학'이 아니라 '대중소설'로 분류되거나, '상업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정말로 좌파적 작품이 더 문학적으로 우수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하나의 가설은 이것이다. 좌파적 가치—평등, 정의, 연대—는 말하기 쉽고 팔기 쉽다. 겉으로 보기에 도덕적으로 확실하고, 반박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그럴듯하다. "우리는 약자를 위해 써야 한다"고 말하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불평등은 잘못됐다"고 말하면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문학계는 이 정의로움을 일종의 통화로 사용한다. 작가는 정의로운 주제를 다룸으로써 도덕적 권위를 얻고, 출판사는 그런 작품을 출판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이미지를 얻고, 평론가는 그런 작품을 칭찬함으로써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모두에게 이득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진실은 어디로 갔는가. 정말로 세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있는가, 아니면 그저 옳아 보이는 것을 반복하는 것인가.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겉멋이다. 진짜 이해보다는 도덕적 제스처가 중요한. 진짜 인간을 보는 것보다 보기 좋은 인간상을 그리는 것이 중요한.
문학이 다루는 인간상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구조적 피해자는 많이 등장한다. 가난한 사람, 차별받는 사람, 소외된 사람. 이들의 고통은 세밀하게 묘사되고, 그들의 분노는 정당화되고, 그들의 실패는 사회의 탓으로 돌려진다.
그런데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어디 있는가. 평범한 환경에서, 특별한 핸디캡 없이, 그저 자기 자신과 씨름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사람들. 매일 출근해서 일하고, 조금씩 실력을 쌓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고, 유혹을 이겨내고, 나태함과 싸우고, 그렇게 자기를 극복해가는 사람들.
이들은 문학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해도 배경 인물이거나, 조롱의 대상이거나, 각성해야 할 우매한 대중이다. 왜 그럴까. 너무 평범해서? 너무 식상해서? 아니면 이들의 이야기가 좌파적 서사에 맞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이렇게 산다. 거대한 구조적 억압의 희생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권층도 아니고, 그저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들. 완벽하지 않은 부모 밑에서 자라고, 완벽하지 않은 학교를 다니고, 완벽하지 않은 직장에 취직해서, 불완전한 자기 자신과 매일 협상하며 살아간다.
이들의 삶에는 드라마가 없는가. 치열함이 없는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치열함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진실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치열함은 문학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구조를 탓할 수 없으니까. 명확한 악당이 없으니까. 정의로운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없으니까.
좌파적 작가들이 설정하는 악당들을 보면 패턴이 있다. 탐욕스러운 재벌, 냉혹한 자본가, 권위적인 가부장, 차별적인 기득권. 이들은 분명하게 나쁘고, 비난받아 마땅하고, 독자가 죄책감 없이 미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악당들은 현실에서 얼마나 흔한가.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악은 이렇게 명확하지 않다. 악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 나쁜 의도가 아니라 나약한 의지, 구조적 억압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 만들어내는 불행.
가까운 사람을 배신하는 친구, 책임을 회피하는 동료, 노력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가족, 도움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이웃. 이들은 악당이 아니다. 그저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는 그런 존재다. 이것이 진짜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악을 다루는 것은 불편하다. 명확한 구도가 무너지니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이니까. 독자도, 작가도, 그 불완전함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게 드러나니까. 그래서 작가들은 편리한 악당을 선택한다. 멀리 있는, 명확한, 안전하게 비난할 수 있는.
더 아이러니한 건, 진짜 현실에 존재하는 악당들을 다루는 것은 거부한다는 점이다. 좌파 진영 내부의 위선, 진보를 표방하면서 자기 이익은 챙기는 사람들, 약자를 대변한다면서 정작 약자를 도구화하는 사람들, 다양성을 외치면서 다른 생각은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모순들은 왜 문학의 주제가 되지 않는가. 너무 가까워서? 아니면 자기 진영을 비판하는 것이 두려워서?
좌파적 작가들이 그리는 세계에는 어떤 편안함이 있다. 문제의 원인이 명확하고, 해법이 단순하고, 도덕적 우위가 확실하다. 더 많은 복지, 더 강한 연대, 더 평등한 분배. 이것만 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이런 이상주의는 아름답다. 하지만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 인간의 본성—이기심, 게으름, 시기심, 허영심—은 어떻게 되는가. 선의로 시작한 정책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는 현실은 어떻게 되는가. 도움을 받아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 기회를 얻어도 낭비하는 사람들, 자유를 주면 방종으로 흐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불편한 질문들을 던지지 않고, 적당히 이상주의적인 설정에서 글을 쓴다면, 그것이 정말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안전한 위치에서 안전한 말을 반복하는 것일까.
진정성이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신념에 반하는 현실도 직시하는 것. 자기 편의 모순도 지적하는 것. 쉬운 답 대신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 그런데 많은 작가들은 이것을 하지 않는다. 이미 정해진 답을 반복할 뿐이다.
좌파적 세계관은 대개 낙관적이다. 인간은 본래 선하고, 환경이 사람을 악하게 만들며, 구조를 바꾸면 인간도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불평등은 제도의 문제고, 가난은 사회의 책임이고, 범죄는 환경의 산물이다. 이 관점에서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보다 구조와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
이런 시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구조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더 복잡하고 불편한 진실들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때로 이유 없이 잔인하다. 환경이 좋아도 나쁜 선택을 한다. 기회가 주어져도 노력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아도 감사하지 않는다. 자유를 얻으면 책임을 회피한다. 평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특권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인간은 아니지만, 일부가 아니라 상당수다.
좌파적 작가들은 이런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다루는가. 대개 그것조차 구조의 탓으로 돌린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된 이유가 있다고, 사회가 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이것이 때로는 깊은 통찰이지만, 때로는 변명이 된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지워버리는.
반면 보수적 시각은 인간의 이기심, 나약함, 비합리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그래서 완벽한 사회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상보다 현실을, 급진적 변화보다 점진적 개선을, 거대한 구조보다 작은 공동체와 개인의 노력을 신뢰한다. 이것이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쩌면 더 정직한 것일 수도 있다.
문학계가 좌파적 작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옳다고 믿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시스템의 자기 재생산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좌파적 성향의 편집자가 좌파적 작가를 발굴하고, 좌파적 평론가가 그들을 칭찬하고, 좌파적 교수가 그들을 가르치고, 그렇게 길러진 신인이 다시 같은 가치를 재생산한다.
이 시스템 안에서 다른 목소리는 점점 줄어든다. 의도적 배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택의 결과로. 개인의 노력을 다루는 작품은 '깊이가 없다'고 평가받고,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는 작품은 '냉소적'이라고 여겨지고, 좌파적이지 않은 관점은 '문학적이지 않다'는 낙인이 찍힌다. 그러면 그런 작품을 쓰려는 작가도, 출판하려는 출판사도, 평가하려는 평론가도 줄어든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스스로를 다양성의 옹호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주변부의 이야기를 끌어올리고, 억압된 서사를 복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관점의 다양성에는 관대하지 않다. 좌파가 아닌 시각은 다양성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매일 자기와 싸우며 나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학적 가치'가 없다고 치부된다.
좌파적 작가들이 그리는 세계에는 어떤 패턴이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하다. 선과 악이 구분된다. 문제의 원인이 분명하다. 그리고 해법은 대개 구조적 변화다. 더 많은 복지, 더 강한 규제, 더 평등한 분배.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깔끔하지 않다. 피해자가 다른 누군가의 가해자이기도 하고, 선의가 악한 결과를 낳기도 하고, 구조적 해법이 새로운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복지가 의존성을 낳고, 규제가 혁신을 막고, 평등을 위한 노력이 오히려 불평등을 고착화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구조 개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매일의 선택, 작은 노력, 자기 훈련, 유혹과의 싸움. 이런 것들이 삶을 만든다. 어떤 사람은 나쁜 환경에서도 일어서고,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도 무너진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구조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런 복잡성을 다루려면 불편해진다. 명확한 정의가 흐려지고, 도덕적 우위가 불분명해지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이 복잡성을 회피한다. 단순한 구도를 유지하고, 명확한 악을 설정하고, 편안한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겉멋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진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세상을 그리는 것.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싶은 방식으로 재단하는 것.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고, 편안한 이상만 반복하는 것. 진짜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외면하고, 피해자 서사만 반복하는 것.
그렇다면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적당히 이상주의적인 설정에서, 편리한 악당을 설정하고, 구조적 해법을 제시하고,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진정성인가.
아니면 불편하더라도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진정성인가. 평범한 사람들의 치열함을 인정하는 것,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쉬운 답 대신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 자기 진영의 모순도 지적하는 것, 현실에 진짜 존재하는 악을 외면하지 않는 것.
많은 작가들이 전자를 선택한다. 후자는 위험하니까. 비난받을 수 있고, 배척당할 수 있고, '문학적'이지 않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그래서 안전한 길을 간다. 칭찬받을 주제를 선택하고, 인정받을 입장을 취하고, 박수받을 결론을 낸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작가가 해야 할 일일까. 작가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모두가 외면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었나. 안전한 곳에서 안전한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결국 문제는 좌파나 우파가 아니라, 정직함의 부재가 아닐까. 진짜로 인간을 보려는 노력의 부재.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려는 용기의 부재. 자기 진영의 논리에 갇혀서, 반대편의 말은 듣지도 않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념으로 재단하고, 진짜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는 외면하는 것.
문학계가 좌파적 작품을 선호하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좌파적이어서가 아니라, 획일적이어서일 것이다. 한 가지 인간상만 인정하고, 한 가지 서사만 가치 있다고 여기고, 한 가지 관점만 문학적이라고 평가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작가들이 진실보다 인정을, 통찰보다 칭찬을, 용기보다 안전을 선택하는 것.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가요. 평범한 환경에서 자기와 싸우며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왜 문학에서 사라졌을까요. 정말 식상해서일까요, 아니면 그런 이야기가 특정 이념에 맞지 않아서일까요. 그리고 현실에 진짜 존재하는 악을 외면하면서 가상의 악당만 설정하는 것이, 정말 진정성 있는 작업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