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시대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세상은 한 바퀴 돌아 있다. 자는 동안 쌓인 알림들, 읽지 못한 뉴스들, 놓친 트렌드들. 우리는 종종 뒤처지는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친구는 벌써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동료는 또 다른 자격증을 땄고, 인스타그램의 누군가는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다. 변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정말 앞으로 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바쁘게 제자리를 맴도는 걸까. 빠르게 움직이는 것과 제대로 움직이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속도 그 자체를 목표로 삼게 된 것 같다. 더 빨리 배우고, 더 빨리 적응하고, 더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그 안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자유라는 말의 무게
자유란 무엇일까.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것? 아무도 나를 막지 않는 것?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많은 선택지 앞에서 오히려 불자유함을 느낄까. 넷플릭스 앞에서 한 시간을 헤매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수십 개의 채용 공고를 보면서도 어떤 것도 내 것 같지 않다고 느끼는 이 감각.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생각한다. 직장으로부터, 관계로부터, 의무로부터. 그래서 퇴사를 하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모든 것을 리셋하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마치 자유라는 게 어떤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무게 같은 것처럼.
진짜 자유는 어쩌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 나조차 나에게 부과한 기대들 중에서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구분해내는 일. 그게 생각보다 어렵다.
변화 속에서 중심 잡기
빠른 변화가 나쁜 건 아니다. 새로운 기술은 우리의 가능성을 넓혀주고, 낡은 관습이 깨지면서 더 나은 방향을 찾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변화의 속도에 맞춰 살다 보면, 정작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어볼 틈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빠르게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채, 저항 없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어느 날 카페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몇 년 만에 만난 건데, 예전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너는 안 바꿨네"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 친구는 말했다. "나도 많이 바뀌었어. 다만 밖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안에서." 그 친구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점점 더 자기 방식을 찾아가고 있었다. 더 깊이 파고들고,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변화하지 않는 것도 용기다. 모두가 옮겨갈 때 자리를 지키는 것, 새로운 게 좋다고 할 때 익숙한 것의 가치를 다시 보는 것. 물론 반대로, 변화하는 것도 용기다. 불안정해 보여도 새로운 길을 시도하는 것. 중요한 건 남들이 하니까, 혹은 하지 않으니까가 아니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것 같다.
작은 자유들
진정한 자유는 거창한 곳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세계일주를 떠나는 것만이 자유가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선택들에서도 자유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피곤한데도 약속을 지키려 애쓰다가 "오늘은 쉬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모두가 좋다는 책이 나한테는 안 맞는다고 인정하는 것. SNS에 올리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그냥 느끼는 것.
어떤 사람은 매일 아침 산책을 한다. 아무도 깨지 않은 시간, 세상이 조용할 때 혼자 걷는다고 했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의 기대도, 일정도, 계획도 없다고. 그게 그 사람에게는 자유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하루는 연락을 끊는다.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고, 오롯이 자기 시간을 보낸다. 처음엔 불안했지만, 이제는 그 하루가 일주일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고.
자유는 거대한 탈출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작은 실천들의 축적인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나를 지치게 하는지, 언제 충전되는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걸 존중하는 것.
속도를 조절할 권리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고 해서, 나도 그 속도에 맞춰야 한다는 법은 없다. 물론 적응은 필요하다. 완전히 세상과 동떨어져 살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적응과 종속은 다르다. 나는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되, 내 속도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는 빠르게 달려가는 게 맞고, 누군가는 천천히 걷는 게 맞다. 어떤 시기에는 멈춰 서는 게 필요하고, 어떤 시기에는 뛰어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건 그 선택이 두려움이나 남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진짜 내가 원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 뒤처지는 게 무서워서 억지로 따라가는 것도, 변화가 싫어서 고집부리는 것도 아닌.
그러려면 자주 멈춰서 물어봐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인가. 피곤함과 충만함을 구분할 줄 아는가. 때로는 느리게 가는 게 더 멀리 가는 길이고, 때로는 멈추는 게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자유로워지기보다 자유로워지고 있기
결국 자유는 완성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자유로워'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 우리는 매일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는 중일 수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를 알게 되고, 어제보다 조금 더 솔직해지고, 어제보다 조금 덜 두려워하면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자유는 어쩌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에 휘어지지만 부러지지 않는 나무처럼. 물살에 떠내려가는 듯 보이지만 자기 방향을 아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려 애쓰기보다, 오늘 하루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드는 작은 선택을 해보는 건 어떨까. 거절할 수 있는 용기, 느리게 갈 수 있는 여유,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믿음. 그런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