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선택, 일, 관계. 이 모든 영역에서 자유를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하나의 진실과 마주했다. 대부분의 한계는 사실 한계가 아니라는 것을. 가난은 부를 축적하여 극복할 수 있고, 무지는 학습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약한 몸은 단련으로 강해질 수 있고, 서툰 관계는 경험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 재능이 부족하다면 노력으로 메울 수 있고, 환경이 불리하다면 환경을 바꾸면 된다. 심지어 심리적 장벽조차 시간과 의지를 투자하면 무너뜨릴 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 그 무엇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바로 시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절대적 평등. 빌 게이츠에게도, 노숙자에게도, 천재에게도, 평범한 사람에게도, 젊은이에게도, 노인에게도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같다. 이것은 협상 불가능하고, 거래 불가능하며, 우회 불가능한 유일한 한계다.
우리는 흔히 많은 것을 '한계'라고 부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한계가 아니라 단지 현재의 상태일 뿐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을 보자. 언뜻 보면 경제적 한계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는 수많은 반례를 보여준다. 오프라 윈프리는 가난과 학대 속에서 자랐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 인물이 되었다. 이건희 회장의 부를 물려받은 이와 맨손으로 시작한 정주영의 자산 규모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둘 다 경제적 자유를 획득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가난은 극복 가능하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가능하다.
신체적 조건은 어떤가.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으로 몸이 거의 마비되었지만 우주의 비밀을 탐구했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도 교향곡 9번을 작곡했다. 닉 부이치치는 팔다리 없이 태어났지만 세계를 돌며 수백만 명에게 영감을 준다. 물론 이들은 예외적인 경우다. 하지만 그들이 증명하는 것은 명확하다. 신체적 한계조차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보완할 수 있고, 우회할 수 있고, 때로는 다른 능력으로 압도할 수 있다.
재능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모차르트는 천재였지만, 바흐는 부지런함의 화신이었다. 마이클 조던은 고등학교 때 농구팀에서 탈락했다. 아인슈타인은 언어 발달이 늦었고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았다. 재능은 시작점일 뿐, 도착점을 결정하지 않는다. 1만 시간의 법칙이 완벽하진 않지만, 그것이 말하는 본질은 사실이다. 노력과 시간의 투자는 재능의 부족을 상당 부분 상쇄한다.
관계에서의 어려움, 심리적 트라우마, 사회적 편견. 이 모든 것들도 불변의 한계가 아니다. 상담을 받을 수 있고, 환경을 바꿀 수 있으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 차별받던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성인이 되어 건강한 가정을 꾸릴 수도 있다. 쉽지 않다. 때로는 평생이 걸린다. 하지만 가능하다. 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극복 가능한' 범주에 속한다는 점이다. 더 많은 돈을, 더 나은 기술을, 더 강한 의지를, 더 좋은 환경을 투입하면 변화시킬 수 있다. 비용의 문제, 난이도의 문제, 확률의 문제일 뿐,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시간은 다르다. 근본적으로, 절대적으로 다르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하루를 25시간으로 만들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져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가져도 시간을 저장해 둘 수 없다. 시간은 매 순간 흘러가고, 사용하든 낭비하든, 의식하든 무시하든, 그것은 일정한 속도로 소진된다.
세계 최고의 부자들을 보자. 그들은 개인 비행기로 이동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조수를 고용해 잡무를 위임할 수 있으며, 최고의 의료 서비스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다. 제프 베조스가 아마존을 경영하는 시간, 워렌 버핏이 투자를 결정하는 시간, 일론 머스크가 여러 회사를 이끄는 시간. 모두 같은 24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이루는 이유는 시간이 더 많아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천재는 어떤가. 아인슈타인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들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었다. 그들의 뛰어난 두뇌는 생각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통찰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지만, 시간 자체를 늘릴 수는 없었다. 상대성이론은 시간이 속도와 중력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고 말하지만, 지구에서 인간의 속도로 사는 우리에게 그 차이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계를 보며 산다.
젊음은 어떤가. 20대의 체력과 에너지가 40대보다 낫다 해도,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다. 더 오래 깨어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면 없이는 결국 무너진다. 밤을 새워도 다음 날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시간을 속일 수 없다.
기술은 어떤가. 우리는 컴퓨터로 계산 속도를 높이고, 인터넷으로 정보 접근을 빠르게 하며, 자동화로 반복 작업을 제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는 일은 시간을 늘리는 게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시간의 양은 변하지 않는다. 100년 전 사람도 하루 24시간을 살았고, 100년 후 사람도 하루 24시간을 살 것이다.
이것이 시간의 잔인함이다. 절대 평등.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변경 불가능한 조건. 당신이 누구든, 무엇을 가졌든, 어디에 있든,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24시간이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며, 평생 그럴 것이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책을 읽고, 모든 기술을 배우고, 모든 장소를 여행하고,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다. 다시 하면 되니까. 잘못된 선택을 해도 문제없다. 다른 선택도 나중에 시도하면 되니까. 미루고 또 미뤄도 상관없다. 어차피 시간은 무한하니까.
하지만 시간은 유한하다. 그것도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이 사실이 모든 선택의 구조를 바꾼다.
당신이 하루에 8시간을 일한다면, 남은 16시간 중 8시간은 수면과 식사, 이동 같은 기본 생활에 쓰인다. 그럼 실제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8시간. 그 8시간으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운동을 할까, 독서를 할까, 친구를 만날까, 가족과 시간을 보낼까, 취미 생활을 할까, 자기계발을 할까.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시간이 부족하다.
선택은 곧 포기다. A를 선택하는 순간 B, C, D는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수학의 문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루 8시간을 독서에 쓰면서 동시에 운동에 쓸 수 없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가족과 저녁을 먹을 수 없다. 이 모임에 가면 저 모임에 갈 수 없다.
시간의 한계는 모든 선택에 비용을 부여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당신이 Netflix를 보는 2시간은 책을 읽지 못한 2시간이고, 운동하지 못한 2시간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지 못한 2시간이다. Netflix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것도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비용이 따른다.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는 비용.
더 심각한 것은 시간이 축적된다는 점이다. 하루의 선택은 한 달이 되고, 한 달의 선택은 일 년이 되며, 일 년의 선택은 인생이 된다. 매일 2시간씩 책을 읽는 사람과 매일 2시간씩 게임을 하는 사람은 1년 후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다. 10년 후는? 20년 후는? 차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진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시간은 있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할 시간을 배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선순위를 다르게 둔 것이다. 이것은 비난이 아니라 사실의 진술이다. 우리는 모두 매 순간 시간을 어떻게 쓸지 선택하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시간의 잔인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돈을 잃으면 다시 벌 수 있다. 건강을 잃으면 회복할 수 있다. 관계가 깨지면 회복하거나 새 관계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20대를 방황으로 보낸 사람은 30대가 되어 후회할 수 있다. 그 후회가 동기가 되어 30대를 열심히 살 수는 있다. 하지만 20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20대의 체력, 20대의 가능성, 20대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졌다.
자녀가 어렸을 때 일에만 매진한 부모는 나중에 그 시간을 후회할 수 있다. 이제라도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하던 순간, 처음 말을 하던 순간, 학교에서 상을 받던 순간. 그 순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진과 비디오는 남아있지만, 그 시간 속에 함께 있지 못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잘못된 투자로 돈을 잃었다면 다시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 쓴 시간은?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일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실패한 사업에 3년을 쓴 사람은 교훈을 얻고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3년 자체는 사라졌다. 그 시간에 다른 길을 갔다면 어땠을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이것이 시간을 다른 모든 자원과 구별하는 결정적 특성이다. 재생 불가능. 대체 불가능. 보상 불가능. 한 번 쓰면 끝이다. 잘 쓰든 못 쓰든, 의미 있게 쓰든 낭비하든, 그 시간은 사라진다. 누구도, 무엇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선택은 다른 선택보다 무겁다. 주식에 투자해서 잃으면 아프지만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10년을 잘못된 길에 쓴다면? 그 10년은 영원히 사라진다. 물론 그 10년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배웠고, 경험했고,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선택이 가능했다면? 그 가능성은 이제 알 수 없다. 시간은 A/B 테스트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유 시리즈를 쓰면서 나는 시간, 선택, 일, 관계의 자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모든 자유의 근본에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시간의 자유를 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원하는 시간에 쉬고, 원하는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하지만 하루는 24시간이다. 모든 것을 다 할 시간은 없다. 시간의 자유는 시간의 양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어떤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일을 할지, 누구와 관계를 맺을지, 어떤 가치를 추구할지. 하지만 모든 선택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리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택의 자유는 많은 것을 선택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능력이다. 시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일에서의 자유를 생각해보자. 경제적 자유를 얻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하지만 일하지 않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시간도 24시간 안에 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시간은 흘러간다. 일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시간을 다르게 쓸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지, 시간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관계에서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원한다. 하지만 관계는 시간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한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3시간은 다른 사람과 보낼 수 없는 3시간이다. 관계의 자유는 많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에 시간을 투자할지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자유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모든 자유를 다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하루 24시간으로 제한되어 있고, 인생은 한정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절대 한계다.
역설적이게도, 이 한계 때문에 자유가 의미를 갖는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선택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나중에 다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에, 선택은 무게를 갖는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자유의 본질이다. 한계 안에서의 선택.
시간이 1일 24시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더 이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않게 된다. 시간은 부족한 게 아니다. 원래 그것뿐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문제는 시간의 부족이 아니라 선택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더 이상 "나중에"라는 말에 속지 않게 된다. 나중은 없다. 있는 것은 지금뿐이다.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 해야 하고, 내일도 역시 24시간뿐이다. 미루는 것은 시간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이다. 지금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좌절하지 않게 된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많은 것을 하지? 비결은 간단하다. 당신이 하는 다른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이 책을 쓰는 시간에 당신은 Netflix를 봤고, 그 사람이 운동하는 시간에 당신은 친구와 수다를 떨었을 뿐이다.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그들에게도 24시간뿐이다.
시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면, 우선순위가 명확해진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무엇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이 10년 후에도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시간이 강요하는 선택이다.
시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면, 집중이 가능해진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식사에 집중하고, 일할 때는 일에 집중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그 사람에게 집중한다. 멀티태스킹은 환상이다.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의를 빠르게 전환하며 모든 일을 반쯤만 하는 것이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제대로 하는 것이 낫다.
시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면, 거절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요청에 응할 수 없다.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없다. 모든 모임에 갈 수 없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현실 인식이다. Yes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에 No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간은 24시간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면 현재에 살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불안해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지금뿐이다. 그리고 이 지금도 읽는 동안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을 최대한 온전히 경험하는 것, 그것이 시간의 한계를 받아들인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재능은 계발할 수 있다. 부는 축적할 수 있다. 관계는 개선할 수 있다. 건강은 회복할 수 있다. 지식은 쌓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은, 1일 24시간이라는 이 절대적 평등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하고 절대적인 한계다. 그리고 바로 이 한계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의미를 갖고, 우리의 삶은 가치를 가지며, 우리의 자유는 진정성을 얻는다.
시간의 자유, 선택의 자유, 일의 자유, 관계의 자유. 이 모든 자유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마주하는 질문이다. 오늘도 24시간이 주어졌다. 어제와 똑같은 24시간. 내일도 똑같을 24시간. 당신은 이 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계를 명확히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실제로 가능한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하려는 헛된 시도 대신,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1일 24시간. 이것은 한계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다. 매일 아침, 백지 상태의 24시간이 주어진다. 어떤 색으로 채울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천재와 범인, 강자와 약자.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어쩌면 이것이 우주가 인간에게 준 유일하게 공정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누구든, 무엇을 가졌든, 오늘 당신에게는 정확히 24시간이 주어진다.
문제는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간으로 무엇을 선택하느냐다. 그리고 그 선택이 쌓여 인생이 된다. 자유란 결국, 이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의미 있는 선택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당신의 오늘 24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