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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Dec 29. 2020

소중한 인연들

엄마의 장례기간은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될 즈음이었다. 장례 첫날은 난데없이 태풍이 오기도 했었다. 나의 지인들 중엔 아직 어린 자녀를 키우는 애엄마들도 많았던 터라, 적당한 선에서만 부고 연락을 돌렸었다. 대략 5~6년 전까지만 해도 연락하고 지냈으나, 각자의 삶이 바빠져 소식이 끊어진 이들에겐 따로 부고 문자를 돌리지 않았다. 코로나 19 상황에 연락을 전해도, 조문 오지 못해 미안한 마음만 가득할 테니, 굳이 그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J언니와는 결혼 전,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을 함께 하며 매우 친하게 지냈었다. 내가 많이 의지했다. 함께 등산을 다니기도 했고, 연애상담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이전 회사에서 알고 지내던, 나와 종교가 같았고, 비교적 성품이 좋다고 생각되었던 남직원과 J언니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그 남직원은 형부가 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내가 결혼을 했고, 결혼 후, J언니도 나도 레지오 활동을 그만두었고, 언니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 뒤로는, 연락이 뜸해지다가 이내 소식이 끊어졌다.


엄마의 장례 첫날, 성당 지인들에게 건너 건너 소식을 듣고, J언니가 형부와 함께 조문 왔다. 언니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경험이 있던 터라, 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했다. 마스크를 낀 채로,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언니는 아이들이 아직 어린 데다가, 본인이 초등학교 행정직원으로 일하는 지라, 코로나 19가 매우 조심스러워,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돌아갔다. 장례 끝나고 꼭 만나자고 깊이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며 헤어졌다.


장례 후, 코로나 19가 많이 진정되고 난 뒤, J언니와 만났다. 아무리 코로나가 진정되었어도, 조심스러운지라, 엄마 집에 언니를 데리고 와서, 다과를 즐기며 긴 수다를 나누었다. 대략 5년 정도 지났으니, 서로의 근황 이야기만 한 보따리였다. 긴 수다였음에도,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으니, 자주 보자고, 자주 연락하자고 서로 다짐하고, 아쉬운 만남을 정리했다.     


무려 15년 전에 근무했던 회사(J언니의 남편과 함께 근무했던 바로 그 회사)에서 친하게 지낸 K언니H동생이 있다. 내가 그 회사를 퇴사한 뒤에도, K언니H동생은 아직까지 그 회사에서 잘 버티며 근무하고 있다. 20대 초반에 다녔던 첫 회사에서, 생각해보면, 어설프고 어렸던지라, 실수도 많이 하고, 울기도 참 많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뭐나 되는 줄 알며 일했던 그 시절에, 나와 가장 가까이 지내며 함께 울고, 웃고, 술도 많이 마시고, 상사 욕도 시원하게 해대며 각별히 지냈던 언니와 동생이었다. 퇴사 후에도 자주 만났었고, 함께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보냈었는데, 각자의 결혼 후, 언니와 동생이 아이를 낳고 워킹맘이 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지고, 끊어졌었다.


엄마의 장례 둘째 날, K언니가 밤 10시가 다되어 조문을 왔다. 여전히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J언니의 남편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야근하고 늦게 와 미안하다며, 왜 연락 안 했냐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 늦은 시간에 야근까지 하고 조문을 오다니, 너무 많이 미안하고, 너무 많이 고마웠다. 식사는 하지 못하고, 음료 마시며 그동안의 사는 이야기 서로 전하고, 얼굴 보고, 손 꼭 잡아주고, 다시 연락하자고 인사 나눈 뒤 언니를 배웅했다.


K언니가 떠나고 난 뒤, 나는 더 이상 올 손님도 없고 하여, 밤 11시쯤 남편과 엄마 집으로 가, 씻고 일찍 잠들려는 참이었다. K언니에게 연락받은 H동생이 뒤늦게 전화가 왔다. 장례식장에 왔다고 했다. 아. 이럴 수가. 나는 엄마 집에 이미 왔는데, 어쩌나. H동생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연락 못하고 지내서 미안하다며 전화기 너머로 울고 있었다. 나는 장례 첫날밤, 많이 울고 힘들게 보낸 터라, 둘째 날 밤은 절대 울고 싶지 않았다. 울지 말라며, 내가 이미 엄마 집에 자러 왔다고 전하며, H동생을 달랬다. 미안했지만, 나는 그때 H동생을 보러 갈 자신이 없었다. 지금 가서 동생을 만나면, 나는 또 밤새 너무 많이 울 것 같았다, H동생에게 조문만 하고 어서 집에 가라 전했다. 자정이 다 될 무렵이었다. 조심히 집에 가고, 곧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고 통화를 끊었다.

    

장례 후, 어느 정도 심신을 정리한 뒤, K언니H동생을 만났다. 저녁을 먹고, 술도 한잔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5년 전 어설프고 어렸던 그 시절 이야기부터, 결혼생활, 남편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회사생활, 부모님 안부 등등, 이야기는 공백 없이 계속 이어졌다. 아이들도 이제 제법 컸고, 남편에게 맡기고 저녁 시간에 이렇게 만날 여유가 되니, 우리 이제 연말에도 만나고, 봄에도 만나고, 자주 만나자고 다짐했다. 물론 코로나 19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어, 결론적으로 연말에 만나지 못했지만, 안부 인사 나누고, 서로의 건강을 챙기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다사다난했고, 울고 웃을 일 참 많았던 20대와 30대 초반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마음속 이야기 나누고, 공감하고 의지했던 우리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소식이 끊기고, 서로 어디로 이사하여 어느 동네에 사는지도 모르고, 아이들은 얼마나 예쁘게 커가고 있는지도 못 챙기며, 그저  내 한 몸뚱이, 내 남편, 내 가족만 챙기고, 내 앞가림만 겨우 하며 살게 되었던 요즘 몇 년이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소식이 끊기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나도, 오랜만에 연락하기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연락해도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겠지, 배려 아닌 배려만 하다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런 소중한 나의 인연들을 엄마의 장례를 통해 다시 만났다. 수년간의 세월이 무색하게, 우리는 어색함 없이 서로의 지난 시간을 나누었고, 공감했고, 금세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 위로가 되어주고 있었다. 잠시 잊고 살았던, 잠시 떨어져 있었던 소중한 나의 인연들까지 엄마가 다 챙겨주고 가신 듯했다. 엄마가 챙겨준 소중한 인연들, 오래오래 아끼고, 서로 위로해주며, 잘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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