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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Jan 15. 2021

엄마의 70살 생일

엄마가 떠나고 9월 중순쯤 되자 성당의 미사가 재개되었다. 나는 2020년 2월 중순 경 이후로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지 못했다. 코로나 19가 확산되고, 엄마의 병세는 위중해져,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은, 그곳이 성당이라 해도 조심해야 했다. 나는 엄마의 병원에 주 3회~4회 정도는 꼬박꼬박 출입을 하고 있기에, 백혈병 환자를 곁에 둔 보호자이기에, 성당의 미사참례는 과감히 포기했었다. 엄마가 떠난 후, 성당의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나는 다시 미사참례를 했다.      


나의 둘째 언니는 청소년기, 중고등학교 시절엔 성당 주일학교 활동도 열심히 할 정도로 성당을 좋아했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성당과 점점 멀어졌다. 가끔 엄마가 한 마디씩 하면, 따라나서는 시늉 정도, 그마저도 엄마가 마음을 비우니, 영 성당과 멀어졌었다. 그러나 가끔 물어보면, 종교에 대한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라 했었다. 바쁘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멀어졌을 뿐, 본인은 언젠가는 꼭 다시 성당에 다닐 것이라고 했었다. 마음속엔 늘 하느님이 있다고 했었다.

둘째 언니가 말한, 언젠가는 꼭 다시 성당에 다닐 것이라고 했던 그 언젠가가, 그때가, 이제 왔는가 보다. 엄마가 떠나고, 성당 미사가 재개되니, 둘째 언니는, 본인도 나와 함께 성당에 가겠다고 했다. 앞으로는 매주 미사참례를 할 것이니, 본인을 꼭 데리고 같이 가 달라했다. 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엄마의 생전에 함께 손잡고 미사참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언니는 계속 나와 함께 조카를 데리고 일요일마다 성당에 간다. 긴 냉담에 대한 고백성사도 하고, 미사 중엔 엄마 생각에 가끔 훌쩍이기도 하며, 신실한 신자가 되었다. 엄마가 참으로 기특해하시겠구나.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고, 단풍이 아름다워질 무렵, 10월 말, 엄마의 49재가 왔다. 시간은 참 잘도 간다. 엄마가 떠난 지 49일이 흘렀다. 4남매 모두 미사에 참석하여 49재 미사를 함께 봉헌했다. 엄마의 절친 아주머니, 성당 지인들도 함께 했다. 신부님 수녀님들과 성당 입구에서 인사를 나눴다. 추모관에 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배웅해주셨다. 바로 엄마의 추모관으로 향했다. 주말 오전이라 차가 많이 막혔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추모관에 도착했다. 간단히 예식을 행하고 엄마와 인사도 나누었다.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드렸다.


며칠 후가 엄마의 70살 생일이었다. 고인에게 이승에서의 생일은 별 의미가 없다지만, 엄마의 70살 생일은 챙겨주고 싶었다. 두 달만 더디 가시지. 두 달만 더 버텨보시지. 70살 생일 케이크도 드시고, 딸들이 끓여주는 미역국도 드시고 가시지. 아쉽고, 그리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엄마는 병중에, 고통 중에, 역병이 창궐하는 이승에서의 70살 생일보다, 천상에서, 고통 없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느님과 성모님 곁에서 맞이하는 70살 생일이 더 행복하시겠구나. 싶었다. 아쉬움도 그리움도 다 남겨진 자의 몫일뿐이다. 잘 다스리며 살아야겠다.    

 

점심식사를 하러 근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갔다. 엄마 없는 엄마의 생일이지만, 우리끼리라도 맛있는 음식 먹으며 마지막이 될 엄마의 생일을 기념했다. 우리 4남매는 각자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밥벌이를 할 때쯤부터, 다 같이 매월 몇만 원씩 소소하게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엄마의 환갑 때 조촐히 남해여행도 다녀왔고, 그 이후로는 엄마의 칠순 때 다 같이 해외여행 가자며 계속 돈을 모았었다. 하지만 엄마의 70살 생일에 엄마는 없다. 엄마가 있었어도, 해외여행은 가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를 위해 쓰려고 모았던 돈은, 나눠 갖지 않고, 가끔 이렇게 우리가 모여 식사하거나, 친척들의 경조사 때 쓰거나 하기로 했다.

굳이 70살 생일 말고, 엄마가 건강하셨을 때, 해외여행 한번 가지 못한 게 한이라면 한이다. 엄마는 이모와 중국 여행, 일본 여행을 다녀오셨고, 큰언니와 필리핀 세부 여행을 다녀오긴 했으나, 우리 가족 모두 함께 해외여행을 가보지는 못했다. 국내 여행을 자주 다니긴 했고, 제주도도 다녀오긴 했으나, 그래도 아쉽고, 아쉬웠다. 젊고 건강할 땐 경제적 여유가 없어 미루게 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니, 건강이 안 좋아지고, 그러다 보니, 엄마와 해외여행 한번 가보지 못한 채, 엄마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구나.      


맛있게 식사하고, 근처의 공원길도 산책하며 단풍을 감상하고, 가을을 느꼈다. 엄마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49재는 불교의식에서 유래된 것이라는데, 7일마다 7번을 강을 건넌다는데, 엄마는 그 강을 잘 건너고 건너서, 부처님 아니고, 하느님 곁으로 잘 갔을까. 엄마의 엄마, 아빠, 먼저 간 언니, 오빠들 모두 만났을까. 엄마는 어디쯤 갔을까.      


그렇게 엄마의 49재를 보냈다. 엄마의 생일을 보냈다. 11월이 되었고, 늦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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