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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Jan 18. 2021

엄마의 성경쓰기 노트

엄마와 아래윗집 살며 퇴근길에 엄마 집에 가끔 들를 때면, 엄마는 주방 식탁에 앉아 성경 쓰기 하고 있으실 때가 많았다. 성당에서는 신자들에게 성경 쓰기를 권장한다. 따로 성당 이름이 박힌 노트도 나눠주고, 한 권 한 권 써올 때마다 주임신부님이 칭찬 글도 남겨주신다. 구약성경, 신약성경을 모두 필사하면, 증서도 주신다. 엄마 또래의 중장년 신자들에게 성경 쓰기는 보람 있고 성취감을 갖게 하는 신앙 활동의 하나였다. 언젠가부터인가, 엄마가 주방 식탁에 앉아 성경을 쓰시는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독서대에 성경을 고정시켜 놓고, 노트와 펜과 수정테이프도 준비하고, 식탁 위의 유리가 차가우니 팔 닿는 자리에 수건을 한 장 접어 깔아놓고, 돋보기는 콧등에 안정적이게 걸쳐둔 채, 엄마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심을 담아 성경을 써 내려가셨다. 성경 쓰는데 말을 걸면, 기다리라고 하셨다. 깨알 같은 성경을 보며 옮겨 적으려면 집중력이 필요했다. 내가 엄마에게 말을 걸어 대화를 주고받으며 성경을 쓰다가는, 어느 구절을 썼는지 헷갈리고, 줄을 넘겨 잘못 쓰는 사고가 발생하기에, 엄마가 성경을 쓸 때면, 말 걸지 말고, 기다려야 했다. 쓰던 구절을 마저 쓰시고, 체크를 해놓으신 뒤, 나와 눈을 마주치셨다. 그러면 그때부터 엄마와 수다를 나누곤 했다.


그렇게 쓴 엄마의 성경 쓰기 필사본이, 12권이었다. 엄마는 성경 말고, 레지오 공인 교본도 필사하셨고, 쓰기 준주성범도 하셨다. 대체 이걸 언제 이렇게 매일매일 쓰셨을까. 뭘 이렇게 많이도 쓰셨을까.      

엄마는 쓰는 걸 좋아하셨던 것 같다. 가계부도 쓰셨었고, 일기도 쓰셨었다. 일기는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매일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쓰셨던 것 같다. 딸들과 싸우면 가끔 편지를 써주기도 하셨었다.

 

엄마가 떠난 후, 엄마의 짐을 정리하다 보니, 엄마의 일기나 가계부는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다가구주택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이사 오시면서, 짐 정리를 꽤 많이 하셨었는데, 그때 다 버리신 듯하다. 일기나 좀 남겨두시지, 일기는 다 버리시고, 오히려 성경 쓰기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남겨두셨다. 아마도, 그 신앙심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일기야, 그저 엄마의 하소연, 원망, 고달픔이 담겨 있었을 테지만, 엄마의 성경 쓰기는, 엄마의 신앙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보여주는, 큰 성과물이기에, 버리지 않고 고이 보관해 두셨던 것 같다. 성경 쓰기에 적혀있는 날짜를 보니, 2004년부터 시작이었다. 오래 쓰셨던 것 같다. 중간에 몇 년 비었던 때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는 꾸준히 쓰셨다. 며칠에 한 번씩, 한두 장씩이라도 꼬박꼬박 쓰셨다. 2015년, 유방암 투병 중 항암치료를 받던 그 고단한 시절에도, 엄마는 성경 쓰기를 하셨구나. 고통으로 잠이 오지 않는 밤에도, 어지럽고 기운 없는 와중에도 성경 쓰기를 하며, 마음을 강건히 다잡으셨으리라. 문득, 엄마의 신앙이 엄마를 살게 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짐 정리를 하며, 엄마의 이 성경 쓰기와 다른 쓰기 들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우리 4남매 중 누군가 보관하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4명이 각각 나눠 갖기도 그렇고, 무참히 재활용 쓰레기로 버리기도 그렇고, 엄마가 즐겨 다니던 등산코스에 어딘가 땅을 파서 묻어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못할 일이었다. 태워주는 게 좋은 방법일 듯한데. 딱히 유품을 소각하는 곳에 맡기기엔 양이 너무 적었고, 서울시내에서 딱히 합법적으로 소각할 수 있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캠핑장을 생각해냈다. 우리 4남매 모두 캠핑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돈 더 주고, 호텔이나, 좋은 게스트하우스를 가지, 춥고, 더운데, 야외에서, 굳이 불을 피우고, 불편하게 씻고, 자는 것이 우리는 별로였다. 캠핑 장비가 잘 팔리고, 글램핑장이 뜨고, 갬성 캠핑이라는 말이 오가도, 우리는 캠핑 취향이 아니라, 호캉스가 맞는 취향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캠핑 장비는 전무했다. 여기저기서 어렵게 텐트 하나 겨우 구하고, 스타벅스의 캠핑 의자를 구하고, 어디서 탁자 하나 구하고, 엄마의 성경 쓰기를 태울 페인트통 같은 걸 몇 개 구해서 캠핑장으로 갔다. 단풍철이라 예약도 어렵게 했다. 서울 근교에 위치한 오토캠핑장이었다. 오후에 들어가, 장작을 피워 엄마의 성경 쓰기를 태우고, 간단히 야외 음식을 해 먹고, 밤이 깊어지기 전 캠핑장을 떠났다. 우리는 정확히 우리의 목적인 성경 쓰기를 태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캠핑장을 나왔다.


모두 태우기는 조금 아쉬워, 엄마가 유방암 항암 시절 썼던 노트 두 권은 내가 보관하기로 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그 시절, 엄마는 어느 구절을 쓰며 마음을 다잡으셨을까. 나도 함께 느껴보고 싶었다.     


하늘나라에서도, 엄마는 성경 쓰기를 하실 것 같다. 엄마는 무언가 쓰고 남기는 것을 좋아하셨으니, 성경 쓰기가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엄마는 쓰고 계실 것 같다.      


엄마.

그곳에서도 성경 쓰다가 좋은 구절, 내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싶은 구절이 있음, 나에게 알려줘.

어느 날 문득, 신부님 강론 시간에, 독서나 복음시간에, 마음에 남는 구절, 머리에 박히는 구절이 있으면,

아. 엄마가 나에게 알려주는구나. 알아차릴게.

나도 언젠가는 엄마처럼 코에 돋보기안경 걸쳐 쓰고, 성경 쓰기 해볼게.

그렇게라도, 엄마와 꼭, 함께 할게.

엄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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