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해가 바뀌어 2022년이 되었다. 1월을 다 보내고 설도 보내고 이제 2월이다. 그새 입춘도 지났으니, 겨울도 끝을 향하고 있다.
엄마의 1주기를 끝으로 쓴 글이 없구나.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엄마를 보내고 쓰는 참회록이라 소개한 대로, 나의 글은 엄마에 대한 글이다. 엄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다.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렵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당연히, 글 쓰는 것이 어렵다. 한 문장을 쓰고, 한번 읽어보고, 대여섯 문장을 쓰고 다시 처음부터 한번 읽어보고, 한 단락쯤 쓴 뒤, 숨을 고르며 또 한 번 읽어본다. 엄마에 대해 사무치는 부분을 쓰게 되면, 눈물을 훔치며 쓰기도 하고, 주방으로 가 물 한잔 마시며 타는 듯한 가슴팍을 한참 동안 식히기도 한다. 그렇게 한 페이지 정도 쓰고 나면, 다시 또 읽어보고, 브런치에 올린 뒤 또 읽어보고, 그렇게 며칠 동안 수십 번을 읽어본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자동 검사를 해주니 별 문제가 없는데, 단어가 이게 맞는 것인지, 이런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 엄마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그러다 감정이 몰아치면 또 다스려 보고, 다독여 본다. 이렇게 나는 초보적이고, 유아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써놓고 보면, 글은, 참 많은 감정을 정리하게 해 준다.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는 동안 정리가 되고, 쓰는 동안에도 정리가 되고,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서 또 정리가 된다. 그렇게 나는 나의 감정들을 차곡차곡 수없이 되새김질해가며, 책꽂이의 책들을 정리하듯, 정리해간다.
엄마에 대해 쓸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가끔 생각나는 것들을 자주 메모해두곤 했다. 하지만 막상 노트북을 열고 한글파일을 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의 게으름 때문이리라. 초보적이고 감정적인 어리석음 때문이리라. 그렇게 시간만 보내다 보니, 해를 넘겨버렸다.
브런치에서 알림이 왔다. 120일이 지났다고, 150일이 지났다고, 나의 글이 그립다고 알림을 보내준다. 그다지 나의 글을 기다리는 독자가 있을 것 같진 않으나,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이제 그만 떨쳐내야겠음을 느낀다. 나의 감정들은 매일매일 쌓이고 묵혀져, 돌아보고 정리해야 할 것들로 가득하다. 엄마를 추억하는 일은 공기를 마시고 잠을 자는 것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하는 일이니,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아무리 어렵다 해도, 내가 해내야 하는 일임을 나는 안다.
작년 여름쯤, 나의 브런치 글을 읽고 <생활 성서>라는 가톨릭 매체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의 성경 쓰기 노트’라는 글을 월간지에 싣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엄마가 평소에도 즐겨보시던 잡지였다. 늘 자랑스럽게 책꽂이에 꽂아놓으시던 성경필사본에 관한 글이니, 엄마도 나의 글을 칭찬해주시리라 생각이 들었다. 기획자에게 ‘작가님’이라는 과분한 호칭을 들으며 글을 조금 손보았고, 더할 나위 없는 과분한 찬사와 함께 내 글이 수록된 잡지를 받아보았다. 거기에, 소정의 원고료까지 받았다. 살다 살다, 내가 살다 보니, 작가님 소리 들으며 돈을 벌었구나. 엄마 덕분에 내가 이 무슨 황송한 일인지, 민망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글이 나를 토닥여 주는구나,
나의 글이 나를 북돋우는구나.
나의 글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구나.
고단하고 어렵기만한 글쓰기가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글을 쓰며 나는 또 이렇게 나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여러모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이로운 일임이,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