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가로이 웹서핑을 하다 기사를 하나 보았다.
https://news.v.daum.net/v/20220218050027547
내용을 읽어보니 딱, 엄마의 경우였다.
[ 항암제는 여러 가지 계열이 있는데, 알킬화제, 제2형 토포이소머라제 억제제, 백금화합물 등 3개 계열이 특히 위험도가 높다. 백금화합물 계열의 대표적인 항암제가 시스플라틴, 제2형 토포이소머라제 억제제 계열 약이 독소루비신이다. 세 가지 계열의 항암제는 급성 백혈병을 야기하며, 이 중 2가지 이상을 사용할 경우 치료 관련 골수계 종양 발생 위험이 9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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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암 환자 중 2차암이 많이 발생한 암은 악성림프종이다. 폐-간-대장(결장)-위-형질세포종-전립샘암 순이다. 여성은 유방암이 가장 많다. 갑상샘-난소-악성림프종-형질세포종-자궁경부암 순이다. ]
엄마는 위에 적힌 3개 계열의 항암제 중 하나를 쓰셨다. 그리고 유방암이셨다. 빼도 박도 못하게 딱 들어맞는 엄마의 경우였다.
기사의 마지막엔 적혀있다.
[ 홍 교수는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가 위험하니 받지 말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다만 그 치료로 인해 2차암이 생길 위험이 있기 때문에 5년 간 혈액검사로 잘 관찰하고 고위험 약제를 피하는 게 좋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2차암이 생기면 1년 이내에 5000만원의 진료비가 발생할 뿐더러 치료가 고통스럽고, 무엇보다 5년 생존율이 낮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연구책임자인 한국보건의료연구원 이나래 부연구위원은 "치료 관련 골수계 종양은 예후(치료 경과)가 불량하고 경제적 부담이 큰 암이라서 예방 노력, 조기발견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그래. 맞는 말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대비해 당장의 암을 치료하지 않을 수는 없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일단 몸속에 생긴 암 덩어리는 죽일 수 있는 한 완벽히 죽여야 하고, 깊숙이 그 싹을 도려내야 함이 분명하다. 아무리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가 위험하다 해도, 치료는 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는 그다음을 간과했다. [ 다만 그 치료로 인해 2차암이 생길 위험이 있기 때문에 5년 간 혈액검사로 잘 관찰하고 고위험 약제를 피하는 게 좋다는 뜻 ] 우리는 이것을 행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간과한 것이 아니라, 전혀 몰랐다. 엄마의 유방 속에 자리 잡은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쓰인 약제가 엄마를 또다시 위험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는, 엄마도, 우리 자녀들도, 아무도 몰랐다. 의사들은 알았을까? 알았겠지만, 주의 깊게 살펴 봐주지 않았다.
의사들은 항암치료가 끝난 후, 약 4년 반 동안 1년 혹은 6개월에 한 번씩, 꼬박꼬박 혈액검사를 처방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백혈구 수치가 낮다며 주의를 주었다. 헌데, 무엇을 어떻게 주의해야 한단 말인가. 무리하지 마시고,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잘 주무시란다. 엄마는 항암 후 불면증이 심해 정신과에서 수면제도 늘 처방받아 드셨다. 딱히 생활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몸을 혹사하며 노동을 할 일도 없었다. 대체 무엇이, 엄마의 백혈구를 소멸시킬 만큼 무리한 일이고, 스트레스란 말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만 넘겼다. 백혈구 수치를 걱정하는 게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뿐이었다. '마음 편하게 지내고, 좋은 음식 많이 먹고, 바람 쐬며 여행도 다니고 하다 보면, 별일 없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허나 교만이었다. 무관심이었다.
2020년, 엄마가 백혈병으로 항암치료받으실 무렵, 나는 휴대폰 사진첩을 보다, 2015년 엄마가 유방암 투병하실 때 찍어 둔 항암제 사진을 발견했다. 무심코 궁금해졌고, 그 항암제 이름을 네이버에 검색해보았다. 약에 대한 설명 맨 끝자락에 위와 같은 문구가 있었다. [ 급성 백혈병, 골수형성이상증후군(MDS)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다. ] 순간 멍해졌다. 엄마를 살게 한 약이 엄마를 다시 죽게 하는구나.
왜 이 사진을 그제야 보았을까. 딱 1년만, 딱 1년 전에만, 이 사진을 보았다면, 그래서 그때 검색을 해 보았다면 어찌되었을까. 백혈구 수치가 낮아져 걱정하는 엄마와 나에게, “수치가 낮긴 하지만 그렇다고 백혈병이면 이렇게 못 걸어 다니시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는 의사를 뒤로하고 더 큰 병원에 갔더라면, 더 큰 병원에 혈액암 관련 명의를 찾아갔더라면, 저 문구를 보여주며, '나의 엄마가 이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요?' 라고 적극적으로 물어보았다면, 그래서 단 한달만이라도 엄마의 병을 일찍 알아차렸다면, 그랬다면, 엄마에게 조금의 시간을 더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일찍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좀 더 나은 치료를 받았더라면 엄마와 우리의 미래는 조금 바뀔 수도 있었을까. 인생에서 가장 헛되고, 부질없는 말이 ‘만약’이라는 단어라는데, 후회와 죄책감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되뇌며 나는 허벅지를 내리쳤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많이 울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엄마를 잃은 딸에게, 이런 부질없고 헛된 ‘만약’이라는 가정은, 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잠을 못 이루게 한다.
그때 내가 찾아본, 항암제에 대한 설명 끝자락에 적혀있는 위의 문구가, 이제 더욱 자명한 연구결과가 되어, 기사로 나왔다. 지금이라도 이런 연구결과가 나와 참 다행이다. 이 기사를 본 수많은 암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병에 조금 더 적극적이길, 의료진 앞에서 조금 더 당당하고 질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를, 암으로 엄마를 잃은 유가족으로서 당부하고 응원한다.
덧붙이자면, 이제와, 바쁘고 무신경하기만 했던 엄마의 진료 의사들을 탓할 맘은 없다. 나의 ‘만약’은 그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할 뿐이다. 무지했고 게을렀던 엄마의 셋째 딸은, 나의 참회록에 남 탓을 적어 넣고 싶지는 않다. 다만,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고, 걱정이 걱정을 낳을 뿐이라고, 교만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나의 과거가 부끄럽고, 죄스럽다. 엄마에게 조금 더 신경 쓸걸. 엄마의 병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질걸. 인터넷에 글자 몇 개만 검색해보면, 온갖 정보들이 쏟아지는데, 자식으로서, 나는 의사들보다 더 바쁜척했고, 더 무신경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다. 그리고 나는, 신앙이 있다.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산 것이고, 엄마의 생生과 사死는 나의 신이 다 알아서 살피시고 정하실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만약’의 우물에 나를 가두고, 허우적댄다. 혹여나 내가 부족하여, 나의 어미를 이리도 일찍 잃은 것은 아닐까.
부질없다. 헛되고, 무의미하다. 엄마가 혀를 차며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라고 말씀하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