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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Apr 23. 2022

엄마의 단속과 구속

언니들과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엄하셨다. 다른 가정에 비해 비교적 많이 엄하신 편이었다. 공부나 성적 가지고 혼을 내시기보다는, 거짓말을 하거나, 언니들과 다투거나, 예의 없게 행동하거나 하는 것들로 혼내셨다. 내가 중학생이 된 후로는 혹여나 딸들이 불량 청소년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셨는지,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다거나(엄마의 기준에서), 나쁜 말을 쓴다거나(엄마의 기준에서) 하게 되면 크게 혼을 내셨다. 큰언니는 상고를 졸업하고 일찍 회사생활을 하였는데, 귀가 시간을 엄하게 관리하셨다. 엄마는 늘 식당일을 하셨으므로, 큰언니는 집에 귀가해서 엄마에게 전화로 귀가를 보고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는 일도 가끔 있었고, 그런 날은 큰언니뿐만 아니라 둘째 언니와 나까지 매우 크게 혼이 났다.

     

혼이 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매를 맞는 것이었다. 엄마는 체벌을 하셨다. 손바닥, 종아리, 엉덩이를 때리셨다. 파리채나 빗자루, 적당한 막대기 등을 이용하셨다. 매를 맞는 동안 우리가 아프다고 소리를 내거나 울음소리가 커지거나 하면, 엄마는 우리 입에 수건을 물리셨다. 소리 내지 말라는 의미였다. 동네 창피하니 조용히 하라고 하시며 때리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통 살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대략 25년 전이었던 그때가 아니라 지금 그런 장면이 연출된다면, 옆집에서 아동학대로 신고할지도 모르겠다. 내 주변에, 남동생이 아빠에게 대들다가 하키 채로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긴 했지만, 여자아이들을 우리 엄마처럼 체벌하는 가정은 25년 전 그때도, 드물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의 체벌은 큰언니가 결혼하여 집을 떠나고, 둘째 언니가 대학생이 되고, 내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쯤 사라진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고, 서서히 줄어들다 사라진 것 같다. 아마도 큰언니의 결혼이 계기였던 것 같다.

     

큰언니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귀가 시간을 엄하게 단속하는 엄마와 자주 싸웠다. 그럴 만도 하다. 상고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름 20대 초반의 화려한 시절을 맘껏 즐겨야 하는 그때, 엄마의 귀가 시간 단속은, 속 터지게 답답한 어마어마한 구속이었을 것이다. 큰언니는 반항을 했고, 엄마와 싸우기도 했고, 집을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말 그대로, 번갯불에 콩 볶듯 후다닥 결혼을 했다. 그렇게 집을 떠났다. 누가 봐도, 집을 떠나기 위한, 엄마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결혼이었다. 물론 형부를 사랑했고, 서로 믿음과 확신이 있었으니, 언제 해도 할 결혼이었겠지만, 매우 신속히, 해치우는 듯 결혼을 했다.

      

그 후로, 엄마의 체벌은 조금씩 줄어들었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딱히 엄마에게 맞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도 엄하시긴 했다.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놓으시진 않으셨다. 큰언니한테 하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나까지 대학생이 된 후로, 나와 둘째 언니가 늦으면 자주 전화하시어 어서 집에 들어오라고 채근하셨다. 집안 살림이 여유로워지면서, 생계의 짐을 내려놓으시고, 소일거리나 즐기시기 시작하신 뒤로는, 밤마다 딸들의 귀가를 내내 기다리셨다. 아무리 피곤하셔도, 먼저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셨다. 딸들이 집에 오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하셨다. 그러다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귀가하면, 문을 안 열어주셨다. 문 앞에서 한 시간쯤 기다린 뒤 잘못했다 싹싹 빌면 그제야 열어주셨다. 둘째 언니는 엄동설한에 물 한 대야를 뒤집어쓴 적도 있었다.  연애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클럽도 가고 싶고, 동대문 새벽시장도 가고 싶은데, 엄마는 몽둥이를 내려놓으셨을 뿐, 여전히 딸들의 귀가 시간을 관리하셨다. 나는 답답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버겁기도 했다.

      

그 답답함과 부담스러움과 버거움에 더해져, 나는 성인이 되었음에도, 어릴 적 엄마에게 맞았던 기억이 가슴에 남아있었다. 20대 중반쯤, 나는 엄마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생계의 짐을 내려놓자 일상이 무료해진 엄마는, 다 큰 딸들에게 이것저것 간섭을 하셨고,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인 풍경,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대사 ‘엄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가 내 입에서도 자주 흘러나왔다. 그 말이 다툼이 되기도 했고, 그러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고, 각자의 마음에 벽이 생기기도 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엄했을까. 뭐 그리 대단한 잘못을 했다고 입에 수건을 물려가면서 아이들을 때렸을까. 엄마는 참 예민했구나. 당신만의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었구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의 엄마니까, 나는 그런 엄마의 딸이니까, 그렇다고 큰언니처럼 결혼을 도피 삼아 엄마의 둥지를 떠날 수는 없기에, 나는 받아들이고 적당히 감내해가면서 엄마의 그늘 아래서 살았다.

     

그러다 내가 28살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를 통해 ‘내면 아이 치유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 모임에 참가하여 그룹상담을 받고, 그룹원들과 따로 모임자리도 자주 갖게 되었다. 그 모임을 계기로 나는 내 일생에서 아주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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