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화해
나는 스무 살부터 27,28살 즈음까지, 연애에 있어 계속 반복적으로 좋지 못한 끝맺음을 경험했다. 나는 주체적이고 어른스러운 연애를 하지 못했다. 상대에게 의존적인 연애를 했고, 유아적이고 유치한 경험들을 반복했다. 나는 나 스스로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나는 대체 왜 이 모양일까. 감정적인 사람이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이러는 걸까. 성숙하지 못해서, 말 그대로 덜 자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연애를 많이 못 해본 탓에 경험 부족? 궁금증만 가득했다. 그러다 ‘내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내면 아이’는 상담학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이다. ‘한 개인의 정신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존재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정의되어있다. 내 마음속에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어, 그 아이가 나의 성장을 방해하고, 불쑥불쑥 나의 일상 속에서 나를 괴롭힌다는 말이다. 더 이상의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설명은 내 지식으로는 모자라기에, 생략한다.)
나의 내면 아이는 상처투성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 폭행과 폭언을 모두 목격하며 자랐다. 남편에게 수없이 맞았던 엄마는 이혼하고 자식들을 혼자 키우며, 훈육의 방법으로 체벌을 사용했다. 편모슬하에서 자랐던 나의 유년 시절은 결핍으로 가득했고, 자존감이 부족한 어른으로 나는 성장했다. 나는 나의 내면 아이를 직접 마주했다. 7살의 나와 20대 후반의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목욕도 하고, 잠도 잤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며 나는 7살의 나와 화해했다. 그 모임에선 자존감을 높이는 훈련도 반복했었다. 현재 40살이 된 나의 올바른 자아와 자존감은 모두 그 훈련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나는, 내면 아이 치유모임을 통해, 엄마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성인이 되고, 남녀관계를 경험해 보고, 밥벌이의 고단함을 겪어내며 조금씩 엄마를 이해하게 된 원인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 더해져, 나 자신을 이해하고 성찰하기 위해 나를 객관화시키던 훈련을 통해, 엄마도 한 사람의 인간, 여자, 부모, 딸로서 바라보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엄마가 남편과 이혼하고 딸 셋을 혼자 키우게 된 그때, 엄마는 고작 40살이었다. 여자 혼자 식당 장사를 하며 자식 셋을 키운다는 것은, 지금 현재 시점에서도 보통 일이 아님이 분명한데, 1990년대에는 버거울 뿐 아니라 매일매일이 숨이 턱턱 막히는 삶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그 시절 그리도 엄하게 자식들을 키운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내면 아이 치유모임을 하며 생각하게 되었다. 여자 혼자 장사를 하며 겪었을 수많은 경험들은, 딸들의 귀가 시간을 엄히 단속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여자 4명이 사는 우리 집이 혹여나 시정잡배들의 눈에 띄진 않을까 하여 늘 동네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주목받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엄마는 애썼을 것이다. 엄마는 더욱더 예민해지고, 신경 쓸 것이 많아 늘 곤두서 있게 되고,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언제나 고슴도치 가시를 바짝 세운 채로,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7살의 나를 만나며 엄마의 젊은 시절도 함께 만났다. 나의 청소년 시기를 돌아보며 엄마의 두려움과 예민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실제로는 엄마와 단 한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음에도,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와 화해했다.
그 후,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와 친해졌다. 가까워졌다. 아마도 나의 말투와 행동이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변화하니 엄마도 변화했다. 엄마와 나는 서로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내면 아이 치유모임은 ‘나’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넘어서, 타인에 대한 공감과 화해를 선물해주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엄마와 나는 여느 딸과 엄마처럼 자주 투닥거리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지나가는 바람이고, 훗날 추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뿐이었다.
자식을 때리고 어찌 엄마 마음이 편했을까. 혹여나 아비 없는 자식 소리 들을까 봐, 공부는 못해도 싸가지 없는 짓은 하지 않도록 매사에 엄히 가르쳤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늦게까지 싸돌아다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잘못되진 않을까 단속하고 간섭하며 몽둥이를 들고 수건을 입에 물렸던 엄마의 심정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엄마의 두려움과 예민함 덕에 언니들과 내가 이만큼 살고 있다. 크게 아픈데 없이, 눈에 띄게 모나거나, 상처 난 곳 없이, 비교적 무난하게 잘, 살고 있다. 답답하고 버거웠던 엄마의 단속과 구속이 엄마와 우리를 멀쩡히 살게 했다. 내면 아이 치유모임을 통해 나는 엄마 마음을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고작 발톱의 때만큼일지라도, 엄마 마음 알아주는 셋째 딸이 있어서, 엄마가 조금 덜 외로웠으려나.
그랬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