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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Jul 06. 2022

함께

성찰

나의 20대 초반, 중반 시절은 편안하지 않았다.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면서 나는 매일매일 내가 매우 별로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첫 회사에서 3년을 채우고 퇴사해보니, 내가 마주한 것은 나의 보잘것없음뿐이었다. 이직하는 곳마다 발붙이지 못하고 2,3개월~6개월마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나는 세상에서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방황과 혼란을 인정하지 못했다. 걸핏하면 회사를 때려치우고 오는 셋째 딸이 못마땅하셨으리라. 2008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또다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엄마에게 통보했다. 엄마는 역시나 나를 채근하셨고, 서로 상처되는 말을 나누다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그날 폭발했다. 엄마 방에서 다투다 내방으로 가 방문을 잠갔다. 난생처음 내방의 모든 집기를 집어던지고 깨부수었다. 거울이 깨졌고, 피아노 위에 생채기가 났다. 그리고 나는, 화장대 위에 있던, 아세톤을 마셨다. 손톱의 매니큐어를 지우는, 그 아세톤을, 내 입에 넣었다. 


화가 나서 마셨다. 무엇에 화가 났을까. 나 자신, 나의 방황을 공감해주지 못하는 엄마, 나를 무시하고 상처 주던 수많은 사람들 기타 등등, 난 무언가에 화가 났고, 그 순간 아세톤이 보였다.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 난 그 순간 분명, ‘저걸 마셔도 죽진 않겠지’ 생각했었으니까.   


그 뒤론, 둘째 언니가 상황을 정리했다. 나의 정신이 명료하고 사지육신이 멀쩡하니 119를 부르진 않았다. 둘째 언니가 나의 손을 잡고 어깨를 꼭 안은 채, 한발 한발, 천천히, 걸어서 5분 거리의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엄마는 지갑과 옷가지들을 챙겨 뒤따라오셨다.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건강보험적용을 받으려면 정신의학과 상담을 꼭 받아야 한 대서 상담도 받고, 다음날 걸어서 퇴원했다. 퇴원 후 몇 번의 상담을 더 받았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시도는 아님이 분명했으니, 더 이상 의사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혹여나 우울감이 들면 꼭 다시 병원으로 오라고 당부하셨다.


그 후로 엄마는 나에게 딱히 그날의 일을 언급하지 않으셨다. 며칠 동안 죽을 끓여주셨고, 그 일에 대해 꼭 성당에 가 고백성사를 보라고 당부하셨다. 그게 다였다. 우린 평소처럼 지냈다. 나의 방황을 긴 한숨으로 묵인해주긴 하셨다. 


나는 40살이 된 지금도 때때로 남편과 다투거나 일상 속에서 화를 못 견디는 일이 생기면, 숨이 가빠지기도 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한다. 그러다 집에서 신는 슬리퍼를 집어던지기도 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남편의 등짝을 매우 세게 후려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극한의 분노상황이 생겨도, 더 이상 입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지는 않는다. 내가 성숙해져서, 철이 들어서, 나이가 들어 자제력이 생겨서, 분노조절이 가능해져서 그런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나의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다. 변비가 심해 한동안 일주일이 멀다 하고 자주 변기가 막힐 때도 나의 똥꼬는 괜찮냐며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변기를 뚫어주는 남편이다. 진한 방귀를 뀌어대도 배를 만져주는 사람이다. 부실한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줘도 늘 고맙다 말해주는, 친절하고 사랑 많은 남편이다. 하지만 그런 남편임에도, 내가 입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는, 그런 '뭐 같은' 행동을 참아 줄지는, 감당해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편이 필요하다. 남편을 잃고 싶지 않다. 남편과 함께 살고 싶다. 그렇기에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하지 않아야 한다. 

      

엄마와 나의 둘째 언니는 나의 모든 치부, 바닥의 바닥까지 함께 한 사람들이다. 그때 나는, 그따위 짓을 하면서도 분명 알았다. 그것을 먹는다고 죽지는 않을 것이며, 이 모든 난장판은 엄마와 언니가 정리해 줄 것임을, 그들이 나와 함께 해 줄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하여 그런 짓을 했다. 영악하고 교활하다. 비빌 언덕이 있으니 자빠진 것이다. 대자로 누워 응석 부리고 칭얼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런 비빌 언덕이 없다. 질펀한 배설물로 넘친 변기를 깨끗이 정리해주는 남편임에도, 나의 씻어내지 못할 과오를 덮어주고 감당해줄지는, 모르겠다.     


누가 더 나은가. 


나의 모든 바닥을 함께 견뎌주는 사람, 그리하여,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음에도 감당해주고 덮어주는 사람, 없었던 일처럼 나와 함께 살아내 줄 사람. 

아니면

그런 짓을 견뎌주지는 않을 것 같아, 나를 나 스스로 바로 서게 하는 사람. 나를 나 스스로 감당하게 하는 사람. 나의 치부의 치부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사람. 죽을 때까지 내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  

   

누가 더 나은가. 


쓸데없는 질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우문愚問이다. 이것을 물어 무엇 하나. 

     

다만 나의 답은,

그 누구라도, 우리는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감당해 줄 사람이든, 그런 믿음은 없어 나를 스스로 감당하게 할 사람이든,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여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목숨을 붙어있게 할 누군가와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부모든, 형제든, 부부든, 자식이든, 혈연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수많은 우리의 인간관계 중 그 누구이든 상관없다. 서로를 감당하든, 나 스스로를 감당하든,  우리는 반드시 함께여야 한다. 그 ‘반드시’가 서로에게 살게 할 이유가 되어 줄 것이다. 태어난 김에 사는 나에게,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방향점 없이, 그저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충실할 뿐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누군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나에겐 엄마와 둘째 언니가 있었고, 남편이 있다. 내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엄마나 언니, 남편과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살게 했고, 내가 그들을 살게 할 것이다. 


서로에게 ‘누군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의 전부이다.     


** 엄마. 엄마의 마지막 그날까지도, 우린 그날의 일을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 

나를 감당해준 엄마. 나를 살게 해 준 엄마.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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