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친구 J가 말했다.
난 엄마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그 친구 역시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랐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친구가 초등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내가 8살 무렵 엄마와 아빠는 이혼하셨고, 그 이후로 엄마와 살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생물학적인 부父일뿐, 가족관계증명서 상에 존재하는 부父일뿐, 실재하지 않는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엄마는 나에게, 엄마이고 아빠였다.
그런 엄마가 떠났다는 것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고작 2년도 채 안되었으니, 짧다면 짧기도 한 시간이다.) 모든 것이 생생하고 모든 것이 꿈같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없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상실은, 아프다. 엄마의 장례 몇 달 후 시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있다가 안 계시니 허전하지?’ 나는 그 물음이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있다가 없어져서 허전하기만 한 존재가 절대 아니다. 엄마를 생각하는 건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시간 매 순간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듯 셀 수 없는 일이다. 순간순간 그립고 원망스럽고 후회스럽고 웃음이 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는 일은 하루에도 수천수만 번이다.
엄마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친구의 그 물음에 나는 나의 그리움을 이야기했다.
엄마의 장례 후 엄마의 짐을 정리하러 엄마의 집에 주말마다 자주 갔었다. 집을 팔기까지 몇 달 동안 주말마다 모여 당근 마켓 거래를 하고 간장 고추장들을 정리하고 옷가지와 이불들을 정리하고 함께 모여 밥해먹고 중랑천을 걷고 동네 한 바퀴를 걸었다. 그리고 18층 엄마 집 거실 창문에서 수없이 마음을 다잡으며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지새웠다. 엄마의 집은 아파트 18층, 18층 거실 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새끼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현실감 없는 높이에서,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엄마를 그리워했다. 그러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 이곳에서 몸을 던지면 엄마를 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아니었다. 지금 나의 생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엄마 집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다, ‘아. 내가 지금 엄마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곳에서 떨어지면 엄마를 만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가 닿는 것이다. 그것은 몹쓸 생각도 아니고, 결연한 생각도 아니다. 그저 배고파 눈앞에 있는 빵을 집어먹듯, 지극히 단순하고 욕구에 충실한 생각일 뿐이었다.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돌리면 남편이 있다.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하고, 잠결에 내 손을 더듬기도 하는 남편이 있다. 밤을 새우고 새벽 미사를 가려고 옷가지를 챙겨 입으면 눈뜨고 일어나서 함께 옷가지를 챙겨 입던 나의 둘째 언니가 있다. 그리고 내가 이 이야기를 담담히, 아주 건조하게 늘어놓자,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나의 친구가 있다. 이 사람들 덕에 나는 엄마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이 생을 살아내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함께여야 한다. 내가 함께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나 자신을 부여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존재의 이유를 반드시 잊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서른을 넘기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 왜 그렇게들 자녀의 혼인에 성화를 부리는지,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 가기 시작했다. 부모들은 자식을 혼자 두고 갈 수 없는 것이다. 혼자서 부모의 장례를 감당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부모의 부재를 실감하면서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안다. 그러려면, 한 이불 덮고 자는 배우자가 있어야 하고, 딴생각 들지 않게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만들어 내 줄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부모들은 안다. 그들이 당신들이 떠난 후 남겨진 자식들을 살게 할 것이라는 걸, 우리의 부모들은 안다. 부모들도 그렇게 그 시절을 살아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꼭 배우자가 아니어도 된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이 아니어도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을 진심으로 말할 수 있고 들어 줄 수 있는 누군가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잠자리에 함께 누워있는 누군가가 없다면, 그 새벽에 전화를 받아줄 누군가가 없다면, 이렇게 나처럼 글이라도 써 불특정 다수의 좋아요라도 받는 다면 그것 또한 작지 않은 위로가 된다. 내가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나의 남편은 외동아들이다. 형제자매 없이 혼자다. 장례를 치러보니,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졌다. 그 어마어마한 대사大事를 아무도 없이 혼자 치른다는 것이 어떤 일일지, 상주가 나 혼자라는 것이 어떤 일일지, 나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나의 남편에겐 함께 상복을 입어줄 사람이 나뿐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엄마의 장례를 치른 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어쩌다 한 번씩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훌쩍인다. 남편은 아직도, 내 훌쩍거리는 소리에 조건반사처럼 일어나 내 등을 쓸어준다. 엄마의 장례 동안 남편은, 나와 함께 엄마의 관에 넣을 장미꽃을 사러 상복을 입은 채로 뛰어주었고, 발인 날에는 우리 4남매가 먹을 자양강장제와 드링크를 한 봉지 사들고 와 한 명 한 명에게 나눠주었다. 이런 남편에게 내가 남은 생애 동안 해야 할 일은, 함께 하는 것이다. 상복을 나란히 입고 시부父와 모母의 장례를 함께 해줄 뿐 아니라, 그에 버금가는 우리 생애 펼쳐질 수많은 대소사와 인생의 굴곡들을 나는 그와 함께 해야겠다.
이모가 어쩌다 할머니 생각에 한숨을 쉬면, 고개를 옆으로 하고 나와 눈 마주치며 ‘이모, 슬퍼요?’ 묻는 내 조카가 할머니를 잊지 않도록, 옆에서 내내 우리의 추억을 이야기해주어야겠다.
랜선으로 내 어머니의 임종을 함께해준 내 간호사 친구 J에게, 조건 없이 사족 달지 않고 추앙을 날려 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어야겠다.
언제든, 그 무엇이든, 함께.
아. 좋아요를 아낌없이 눌러주는 독자님들과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