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올여름 역대급 무더위는 9월 늦더위로 이어졌고, 10월에도 단풍은 물들지 않았다. 10월 20일경 단풍구경을 하겠다고 지리산 노고단으로 등산을 나섰지만, 산야는 푸르기만 했다. 물론 산행하기에, 여행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탁 트인 노고단의 절경을 보고, 남원 광한루에서 여유도 즐기며 가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전, 이제야 가로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남편과 북한산 산행에 나섰다. 원효봉에서 내려다보니 아직 노랗고 빨간 잎들 보다는 초록 잎이 더 많았다. 그래도 가을단풍 구경하고 안전히 귀가했다.
엄마는 산을 좋아하셨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식당 장사하느라 바빠서, 점심장사, 저녁장사를 다 해내셨기에, 여가를 즐기실 짬은 없으셨다. 아니, 여가는커녕, 잠잘 시간도 부족하셨을 테니. 그러다 내가 중학생쯤 될 무렵부터 동네분들과 등산을 다니셨다. 한 골목 앞집 옆집 상인분들과 함께 아침 일찍 모여 산행을 하시고, 오후 서너 시쯤 식당문을 열고 저녁장사 준비를 하셨다.
잠잘 시간도 부족하게 식당 일만 하실 때, 엄마는 제법 살이 찌셨다. 무겁게 밀려오는 피로로 인해 허기지고 기운 떨어질 때면 엄마는 밥을 많이 드셨다. 식당일하랴 자식들 키우랴 몰려오는 스트레스 역시 먹는 것으로 푸셨다. 당연히 운동할 시간은 없었고, 노동은 피로와 스트레스를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등산을 다니시며 엄마는 살이 많이 빠지셨다. 운동부족으로 처음에는 금방 숨차하시고 여기저기 근육통으로 힘들어하시더니, 몇 달, 한 해 두 해, 엄마는 점점 산에서 날쌔지셨다고 한다. (함께 산행하시던 이웃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산을 다니며 몇 번 사고가 난 적도 있었다. 등산을 시작한 초반이었는데, 오후 서너 시쯤 귀가하셔서 가게문을 열어야 할 엄마가 해가 지도록 소식이 없으셨다. 그때는 당연히 핸드폰도 없었고, 자식들은 발 동동 구르며 집에서 걱정하고 있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함께 산행 갔던 이웃아주머니와 돌아오셨다. 덕분에 엄마는 식당문을 며칠 닫으셔야 했고, 한고비 넘기신 뒤 목발을 짚고 장사를 다시 시작하셨다. 그 이후로 한동안 등산을 쉬시더니, 다시금 산으로 가셨다.
엄마에게 산은 유일한 낙이었을 거다. 이웃들과 담소 나누고, 맑은 공기 마시고, 몸을 움직여 땀을 내는 활동은 기분을 유쾌하게 하고 활력을 준다. 별별 손님들 다 상대하며 얻은 스트레스, 말 안 듣는 자식들 키우며 겪은 일들을 쏟아내며 엄마는 위로받고 치유받으셨을 테지. 그 시절 딱히 여가거리가 있지도 않았고, 엄마가 술 마시며 유흥을 즐기는 타입도 아니셨으니, 오로지 등산만이, 엄마가 본인을 위해 온전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놀이었을 거다.
시간은 흐르고, 엄마도 나이가 드시고, 식당 장사도 접고, 집에서 소일거리나 하시면서도, 엄마는 등산을 쉬지 않으셨다. 예전에 함께 다니시던 이웃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뒤로는, 주로 이모와 함께 산행을 다니셨다. 식당 문열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니, 여기저기 여유롭게 산행을 다니셨고, 산에서 밤, 대추, 은행, 잣 등등을 부지런히도 주워와 거실과 베란다에 잔뜩 늘어놓고 손질하셨다. 그리고 부지런히 그 열매들을 넣은 잡곡밥과 찰밥을 식탁에 내주셨다. 그러다 내가 결혼하고 엄마 집 아랫집에 신혼집을 얻어 결혼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해가지고 초저녁 즈음, 남동생이 내 집으로 내려와 엄마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산에 간다고 아침에 나갔는데, 핸드폰도 받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그러더니 몇 시간 뒤, 엄마는 옷가지로 주섬주섬 왼쪽 팔을 어깨에 둘러맨 행색으로 귀가하셨다. 다음날 외래진료로 정형외과에 가보니, 골절이었다. 팔이 부러졌으니, 엄마는 한동안 나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감으셨고, 샤워를 하셨다. 그 수고를 내가 묵묵히 해냈을 리 없다. 나는 매번, ‘엄마 다시 산에 갈 거야? 다음에 또 산에 가서 이렇게 다쳐오면 그때는 머리 감겨주고 샤워해 주고 이런 거 없어. 절대 안 해줄 거야. 그런 줄 알아’ 엄포를 놓았고, 엄마는 그 이후로는 산에 가지 않으셨다. 가끔 딸과 사위를 데리고 만만한 등산정도, 산에 올라가지는 않으시고 산 초입에서 밤이나 몇 개 주워 오시는 것으로 대신하셨다. 그렇게 엄마의 등산은 끝이 났다.
엄마가 하늘로 떠난 뒤, 나는 이따금씩 남편과 등산을 한다. 결혼 전, 성당 언니 오빠들과 몇 번 산행 다닌 적은 있었는데, 각자 결혼을 하고, 살이 쪄 체력이 떨어지고, 나이가 들어 관절이 삐걱대며, 주말에는 청소하고 집안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등산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러다 요즘 몇 년, 가끔 산행에 나선다. 아마도 엄마생각이 나서 그런 것 같다.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을 비롯해 서울 인근의 산들까지 두루두루 다녔던 엄마였다. 등산을 하다 보면, 엄마도 이 길을 걸었을까. 엄마도 이 자리에서 사진 한 장 찍었을까. 생각한다. 요즘은 등산로 여기저기 밤이나 도토리 같은 열매들을 가져가지 말라고 크게 현수막이 붙어져 있는데, 그것들을 보며, ‘엄마가 하도 많이 따와서 동물들 먹을 게 다 없어졌다잖아.’ 중얼대며 실없는 웃음도 지어본다. 그 열매들을 결국 다 내가 먹었으면서.
지난주가 입동이었으나, 아직 나뭇잎이 다 떨어지지는 않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 더 산에 다녀와야겠다. 이제는 노랗고 빨간 잎이 초록 잎보다 더 많아졌을 것 같다.
엄마. 하늘나라 단풍은 어때? 거기도 역시나 곱지?
하늘나라 가서 둘리 아줌마 만났어?
(둘리 아줌마는 엄마를 산으로 이끌어준 이웃 아주머니다. 이분은 엄마보다 몇 해 전에 하늘로 가셨다.)
둘리 아줌마랑 같이 금강산도 가고 에베레스트도 가고 알프스도 가봐.
엄마 말처럼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 봐.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나는 워낙 저질체력이라, 엄마처럼 대청봉에 갈 수 있을까? 한번 도전해 봐?
엄마가 함께해 줘. 내가 내딛는 걸음마다, 엄마도 같이 걸어줘.
언젠가 한번 도전해 볼게.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