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기

by 루치아 lucia

엄마가 백혈병 투병하시던 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엄마는 백혈병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로 다리에 심한 종기들이 생겼다. 허벅지 중간쯤부터 발목까지 전체적으로 종기가 났다. 크기가 제법 크고 붉게 부어오른 종기였다. 환자가 아닌 건강한 사람들도 어쩌다 턱밑에 눈에 띄는 뾰루지 하나만 올라와도 욱신욱신 쑤시고 아픈 법인데, 엉덩이에 백 원짜리 동전만 한 종기라도 생기는 날엔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들고, 종기가 터지기라도 하면 아물어 새 살이 돋을 때까지 그 과정이 험난하기 그지없는 법인데, 엄마는 그런 뾰루지와 종기 수십 개를 백혈병환자의 몸으로 견뎌야 했다. 화끈거리고 쑤시고 아리고 쓰리고, 그 고통을 대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근데 문제는 면역력이 워낙 떨어진 환자의 몸이라 도무지 병세의 호전이 없었다. 점점 심해질 뿐, 눈에 띄는 차도가 없었다. 백혈병 환자라 쓸 수 있는 항생제나 진통제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입원해 있는 상태에서는 피부과 의료진도 수시로 병실로 와 통증을 덜어줄 만한 처치들을 이것저것 해주었는데, 퇴원하여 집에 있을 때는 종기 난 다리가 너무 아파 울다가 잠을 못 주무시고 날을 샐 만큼 통증이 심한 날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통증이 너무 심하니 제발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엄마가 울며 전화를 하셨다. 나는 일단 엄마에게 달려갔다. 입원을 하려면 백혈병 담당 교수를 통해 입원해야 하는데, 그 교수의 외래 진료일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건 피부과에서 외래진료를 보고 통증을 덜어줄 처치 몇 가지들을 받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코로나19 첫해였고, 병원 정문을 통과하려면 체온을 측정하여 정상체온일 때 들어갈 수 있었다. 엄마는 백혈병 투병 중이었고, 수시로 미열이 났다. 병원 입구를 통과하려면 타이레놀을 먹고 정상 체온을 만들어놔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엔 피부과 외래진료 예약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라 당일 접수를 해야 했고, 그러면 매우 긴 대기시간을 거쳐야 담당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진료를 봐도, 딱히 의료진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교수에게 진료를 받고 처치 오더를 기다리고, 처치실에 들어가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레지던트가 와서 간단한 처치 몇 가지를 해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거라도 해달라며 엄마는 병원을 가자했고 나는 부랴부랴 택시를 잡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담당교수를 만나기까지 지난한 기다림과 관문을 통과하는 동안 엄마는 휠체어에 앉아 끙끙댔다. 울기도 했고 흐느끼기도 했다. 의사를 만나 처치를 받고 나왔는데도 쉬이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계속 힘들어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좀 참아봐. 좀만 참아봐. 처치받았으니까 이제 괜찮아질 거야. 좀만 참아봐.’ 나는 엄마에게 참으라고 말했다. 턱밑에 뾰루지 하나만 나도 징징거리며 피부과 가서 주사한대 맞아야겠다고 툴툴대던 딸년이, 백혈병에 걸려 수십 개의 종기 난 다리를 질질 끌며 병원 복도에서 끙끙대는 엄마에게, 참으라고 말했다. 나는 고작, 참으라고 말했다.

그 장면이 요즘 계속 떠오른다. 그때 엄마에게 참으라고 말하지 말걸. 우는 엄마의 눈물을 닦아줄걸. 머리를 쓰다듬어 줄걸.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하다고 말할걸. 그게 어려우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나는 고작 한다는 말이 ‘엄마 좀만 참아봐’였다는 게 한스럽고 후회된다.


엄마는 몇 달을 종기 난 다리를 끌어안고 힘들어하셨다. 그러다 면역력이 조금씩 나아지고, 종기도 겪을 만큼 겪었는지, 하나둘씩 아물어 딱지가 생기고 더러는 새살이 돋기도 했다. 하지만 임종하실 때까지 예전 피부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진한 갈색으로 피부색이 변했고 울퉁불퉁 상처자국이 가득했다. 엄마는 그 다리를 쓸어 만지며 애달파하셨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남편은 말한다. ‘너만큼 한 딸은 없어. 너는 잘했어. 최선을 다했어. 장모님은 다 아실 거야. 너도 힘들었잖아. 어떻게 매번 잘해. 장모님도 서운함 없이 잘 가셨을 거야.’ 이런 말들로 나를 위로하고 다독여 준다.

내가 브런치에 쓴 글들을 보고 지인들은 나의 애씀을 인정해 주며, 독자들은 선한 댓글들을 남겨준다. 감사한 말들에 큰 위로를 받고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나는 안다. 지치고 힘들었다는 핑계 뒤에 나의 무심함과 무지함, 짜증과 한숨 섞인 행동과 말들. 간병을 버거워했고, 나의 노고를 당연시할까 봐 생색내고 큰소리쳤으며, 나도 힘들다고 징징댔던 그 시간들 속의 “나”를. 나는 안다. 이래서 자기 검열이 무섭다고 하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무뎌져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후회와 죄책감들. 나만 아는 “그때의 내”가 낯 뜨겁고 원망스럽다.

나는 엄마의 투병이 그리 짧게 끝날지 몰랐다. 고작 9개월 남짓한 엄마의 투병, 나의 간병이 그리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날 줄은 정말 몰랐다. 몇 년씩 부모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간병하는 자식들도 있는데, 나는 고작 9개월 동안 엄마의 눈물과 한숨, 끙끙댐을 받아주지 못하고 나도 힘들다며 투덜댔다. 코로나19 첫해의 그 공포감. 전쟁 통 같았던 대학병원. 외래 한번 다녀오면 말 그대로 진이 빠졌으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그 과정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끼고 엄마 병실에 있다가 나의 집으로 귀가할 때면 나는 후련함을 느꼈다. 아픈 엄마를 병실에 홀로 두고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볍기도 했다. 그 못된 마음을 나는 안다. 내가 안다.


좀 더 잘해줄걸, 좀 더 들여다봐줄걸. 잊혀지지 않는 후회의 순간 속에 “나만 아는 나”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는 내가 너무 못된 것 같아, 이제 와서 그때를 생각하며 회한의 글을 쓰는 내가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난 일요일은 엄마의 5주기였다. 연미사를 드리고 추모관에 다녀왔다. 새벽 5시 10분에 기상해 밤 11시에 잠이 들 때까지 부산스레 움직이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구름 낀 흐린 날씨였으나 덥지 않고 햇볕이 강하지 않아 야외활동하기 좋았고 운전하기도 편했다. 늦은 오후부터는 하늘이 맑아졌고 내가 사는 동네 한강변 공원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엄마가 주는 선물 같았다. 엄마는 분명 하루 내내 우리와 함께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후회와 자책은 시간이 흘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엄마 떠난 지 고작 5년이다. 나는 “나만 아는 나”를 기꺼이 짊어지고, 후회와 자책의 파도를 넘고 넘으며 앞으로 나아가야지. 나는 엄마의 5주기를 보내며, 붉은색 보라색 핑크색 골고루 섞인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며 “내가 아는 그때의 나”를 마주해 본다. 무지하고 무심했으며 버거웠고 무서웠던 "그때의 나", 하지만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를 이해했으며 동경하고 존경했던 ""도 그때 그 시절에 함께 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엄마를 추억하며 글을 쓰는 ""도 여기 있다. 나는 엄마와 함께했던 38년 삶 속의 모든 나와 함께 엄마를 기억하고 새기며 엄마를 추모한다.



엄마. 이제는 고통 없고 아픔 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어요.

건강한 몸, 온전한 다리로 자유로이 훨훨 날아 행복하게 지내요.

참고 견뎌야만 했던 생을 건너, 진정한 평안을 누리길.

엄마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늘 기도할게요.


사랑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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